첫 야간산행이다. 마침 오늘(6.4)은 음력 4월 5일 보름날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지난 4월 정기산행 때, 비가 와서 단체로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도 많이 했지만 일단 우중산행을 감행했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멋진 우중산행의 추억으로 남았다. 그때의 용기를 이어 포도원등산선교회에선 첫 야간산행을 시도했고 짧은 공지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한 명의 회원이 동참했다.
약속장소인 부산 화명동 롯데 캐슬카이저 분양사무실 앞에서 (6월4일(월) 저녁 7시에 모였다. 정기산행 때 자주 보지 못했던 얼굴들도 있어 반가웠다.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얼굴들을 하고서 저녁 7시 10분에 도착한 산성버스를 탔고 꼬불꼬불 출렁거리며 금성동 산성마을에서 내렸다.
처음 계획은 동문에서 북문으로 돌아 천주교목장을 경유해 다시 산성마을로 한 바퀴 돌 계획이었지만 계획을 수정해서 반대방향으로 오르기로 했다. 북문에서 동문까지 가서 산성마을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달밤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다. 소설 속 한 풍경을 옮겨본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달밤. 흰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꽃밭은 아닐지라도 밝은 보름달빛 받으며 호젓이 걸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안고 왔지만 하늘엔 먹구름이 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달빛 벗 삼아 걷는 길이 아니라 달빛과 숨바꼭질 산행이 될 것 같았다.
잘 포장된 넓은 시멘트 길 따라 산으로 향했다. 국청사 옆을 지나 완만한 경사 길은 한동안 이어졌고 북문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어둠 내려 먹물 번지듯 번져나갔다. 북문에 당도하자 6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분들이 있어 서로서로 반가워하며 시끌벅적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밤은 바람도 졸고 있는지 습도가 높고 후덥지근하고 더웠다. 북문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길엔 몸이 땀으로 젖었다. 제법 경사 높은 돌계단 길을 지나 조망바위에 올라 땀을 식혔다. 사위는 어둠에 물들었고 멀리 낙동강이 희미하게 조망되었다. 다시 걷는 길. 나무 데크를 지나고 의상봉 옆을 지나 원효봉에 당도했다. 저만치 내려다보는 어둠에 싸인 부산시내 야경은 생존경쟁으로 북적대던 전쟁터 같은 세상이 어둠에 싸여 쉼을 얻고 있는 듯 했다.
사람 사는 지붕아래 하나 둘씩 피어난 불빛이 모이고 모여서 보석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검은 산들이 가만히 감싸고 그 어둠 속에서 모여 있는 불빛들, 그것은 사람 사는 곳의 불빛들이었다. 어둠에 가려진 삶의 누추한 모양들, 그리고 보석 같고 별빛 같은 불빛으로 그 누추한 삶을 위로하고 있는 듯 했고 어둠에 가려진 도시는 밤이 깊을수록 더 환해졌다.
이렇게 좋은 밤. 야간산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나 서로가 있는 듯 없는 듯 사색을 방해하지 않고 호젓이 걸으면 좋을 일이다. 하지만 첫 야간산행에 설렘 가득 안고 온 사람들 마음은 그저 들떠서, 좋아서 산행 길 내내 얘기하며 파안대소하며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처음으로 등산선교회 산행에 참여한 어떤 권사님은 '난 야간산행만 할래!' 하고 말했고 '다음 달에도 한다고 하자, '다음 주에 당장 하자고 해서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었다. 달빛사냥을 한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도 우린 마냥 즐거웠다. 넘치는 끼,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느라 산성 길을 흔들고 고요한 숲을 흔들어 잠을 깨웠다.
원효봉에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어둠을 도와 걷는 사람들 발걸음은 발뒤꿈치가 들린 듯 가벼웠다. 의상봉을 지나 4망루에 닿았다. 무더운 공기. 조금 높은 4망루엔 언제나 시원타 못해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높은 망루에 오른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가져온 간식을 꺼내놓았다. 많기도 하다. 떡과 빵, 과일 과자, 원두커피까지. 이 밤에도 간식은 풍성했다. 원두커피까지.
즐거운 대화와 간식을 나눠먹으며 노닥거리다보니 아차, 산성버스 막차 시간이 임박했다. 시간에 맞춰 막차 버스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망루에 앉아 이야기꽃 웃음꽃 피다보니 이지경이 되어버렸다. 어쩐다. 아무리 뛰고 뛴다 해도 막차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어둠 속을 걷는 걸음들이 빨라졌다. 걷다가 뛰다가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걸음으로 어둠을 헤치며 이마에 두른 헤드 랜턴 불빛을 비춰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고요한 산성 길에 우리 발걸음소리로 울렸다.
역시 회장은 회장이다. 남편과 함께 맨 먼저 달려간 회장은 일등으로 산성마을 버스 정류소에 도착했고 우리는 그 뒤를 이었다. 우리 걸음도 빠르긴 했지만 전력질주 해 달려간 회장을 믿는 맘이 있어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먼저 도착한 회장이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우리가 도착했고 뒤에 처졌던 사람들도 뒤이어 도착했다. 낙오자 없이. 막 한숨 돌리고 있는데 산성버스가 불빛을 비추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우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대견해했고 파이팅을 외쳤다.
버스 안에서도 방금 우리가 해 낸 일에 대해, 그 스릴 있는 시간 맞추기에 절묘하게 맞춘 것을 감탄해하며 자축했다.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번 야간산행은 언제가 될까. 모두들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 <산행수첩>
1. 일시: 2012년 6월 4일(월)(음력 4월 15일)
2. 산행: 포도원교회등산선교회 야간 번개산행
3. 산행기점: 부산 금성동 산성마을
4. 산행시간: 2시간 35분
5.진행:산성마을(저녁7:25)-국청사(7:35)-북문(8:25)-원효봉(8:55)-4망루(9:10)-동문(9:50)-산성마을(10:00)
6. 특징: ① 화명 대림아파트 앞(7:10)-산성마을(7:25): 마을버스 1번
② 밤 10시 막차 버스: 산성마을에서- 구포(1번 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