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2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2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그때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내가 본 한국전쟁 이야기를 5회 정도 연재하고자 한다. 마지막 회는 최근에 발간된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 종군기자(AFP, 르 피가르 소속) 네 명이 야전에서 발로 뛰며 작성해 전송한 기사들을 한데 묶은<한국전쟁 통신>을 소개할 예정이다.


기사 사이에 소개하는 사진은 기자가 2004년, 2005년, 2007년 세 차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이 한국전쟁 사진 자료 가운데 일부는 이미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30회 연재한 바 있고, 그리고 눈빛출판사에서<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 3>,<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한국전쟁 Ⅱ> 등의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기자 말>

1950. 10. 미 공군 전투기가 적 진지에 융단폭격을 하고 있다.
 1950. 10. 미 공군 전투기가 적 진지에 융단폭격을 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토굴 속으로 머리를 박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낮 시간 냇가에서 놀다가 비행기 소리가 나면 솔개소리에 닭들이 숨듯 가까운 토굴로 들어갔다. 남쪽인 대구 쪽에서 날아온 비행기는 폭탄을 잔뜩 싣고 와서는 아래구미 쪽이나 장터, 그리고 구미초등학교 일대에다가 마구 쏟고 갔다. 그 폭탄 터지는 소리가 워낙 커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토굴 속으로 처박았다.

유엔군의 폭격은 B-29 네댓 대가 편대를 이루어 수십 편대가 날아와서는 폭탄을 쏟았다. 때로는 하늘이 하얗도록 전단지도 뿌렸는데 어른들은 그게 인민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라고 했다. 보름 정도 우리를 따라다니던 경찰관 부인은 피난생활이 길어지자 자기 친정마을인 성주로 떠났다.

1950. 12. 인민군 투항을 권유하는 유엔군 측 비라
 1950. 12. 인민군 투항을 권유하는 유엔군 측 비라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할아버지는 가족 보호 못지않게 소 보호에도 온 신경을 썼다. 우리 집 소가 군인들에게 발각되면 빼앗긴다고 달구지도 금오산 기슭인 대진마을 계곡에 푸나무를 덮어 감추고 이른 새벽이면 소의 워낭도 뗀 채 더 깊은 계곡인 수점골로 몰고 갔다.

어느 날 선기동 앞산으로 소를 뜯기로 간 할아버지는 미군 폭격기가 떨어드린 폭탄에 우리 동네가 불타는 것을 보고 고모부와 허겁지겁 달려 가 우리 집에 붙은 불을 끄고 돌아왔다. 그래서 피난에서 돌아온 뒤 우리 집 본채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다만 아래채만 그을렸다.

1950. 8. 미 전투기 폭격에 불타고 있는 산하.
 1950. 8. 미 전투기 폭격에 불타고 있는 산하.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융단폭격의 기억

날마다 폭격이 더욱 심해지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는 밤새 소를 몰아 대망동 당신 처가에 맡기고는 돌아왔다. 그런 뒤 남자들은 지게에 피난봇짐을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는 낙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 가고자 인동나루 쪽으로 갔다. 하지만 그 일대를 지키던 인민군들에게 혼 줄만 났다.

"남조선 인민들, 어디로 피난 가도 소용없어 야. 미제 쌕쌕이(폭격기)한테 불벼락을 만나기 전에 날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가라요."

 1950. 7. 29. 경북 영덕, 한 가족이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고 줄달음치고 있다.
 1950. 7. 29. 경북 영덕, 한 가족이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고 줄달음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우리 가족들은 하는 수 없이 낙동강을 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신평 사과밭을 지날 때  미군 B-29 공습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러자 우리 가족들은 식량과 가재도구를 모두 팽개친 채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남자들은 사과나무에 올라 매미처럼 나무둥치를 껴안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콩 포기에 납작 엎드려 공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미군 폭격기의 무서움도 모르고는 염소 똥처럼 쏟아내는 폭탄이 매우 신기하여 그것을 보려고 콩밭에서 일어나다가 할머니에게 뒤통수를 쥐어 박혔다. 삼십 분 정도 공습이 끝나자 우리 집 피난민 일행은 팽개친 식량과 가재도구를 다시 챙기고는 할머니 친정 고아면 대망동으로 피난을 떠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때 낙동강 다부동 전투의 폭격이 융단폭격이란 것을 알았다.

1950. 7. 29. 백성들이 소 길마에, 지게에, 머리에 피난봇짐을 얹고, 지고, 이고 정처 없이 피난하고 있다.
 1950. 7. 29. 백성들이 소 길마에, 지게에, 머리에 피난봇짐을 얹고, 지고, 이고 정처 없이 피난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0. 8. 23. 경남 함안, 한 피난민 아낙네가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봇짐을 이고 앞으로는 아이를 놓칠까 붙잡고 열차표를 사고자 줄을 서고 있다.
 1950. 8. 23. 경남 함안, 한 피난민 아낙네가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봇짐을 이고 앞으로는 아이를 놓칠까 붙잡고 열차표를 사고자 줄을 서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대망동의 피난생활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가뭄이 몹시 심했다. 뙤약볕 속에 대망동으로 가는 도중, 다섯 살 난 고종아우가 목이 마르다고 물 달라고 울부짖었다. 모두가 생사의 기로에 선 바쁜 피난길에 아이의 울부짖음에 민망한 고모가 아우를 쥐어박자 그 순간 기절했다. 그러자 일행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웅덩이의 물을 떠다가 아우에게 먹여 살리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진외가 고아면 대망동 깊은 산동네로 피난을 한 다음은 비교적 전쟁의 직접 소용돌이는 피할 수 있었다. 대가족이 한 집에 얹혀살기가 무리이기에 대망동에서는 세 가구가 세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집 가족은 진외가 둘째 아저씨 집에서 피난했는데 그 집에는 나보다 일곱 살 위인 봉진 아저씨가 있었다.

1951. 3. 미국 탱크가 고개를 넘어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1951. 3. 미국 탱크가 고개를 넘어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그 마을에서도 할아버지는 군인들에게 소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아침이면 소를 점티산으로 몰고 간 뒤 저물 무렵이면 돌아왔다. 그 마을에서 소를 치는 일은 봉진 아저씨가 주로 맡았다. 아저씨는 소를 몰고 집을 나설 때 꼭 나를 데려갔다.

그런 날이면 점티 골짜기로 가서 하루 종일 소를 먹인 뒤 해질 무렵 돌아왔다. 소의 배가 불러지면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다 소고삐를 메어놓고 아저씨와 나는 산골 개울에서 가재를 잡거나 풀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흐르는 물에 돌리며 따분함을 잊었다.

그 산골 개울에는 가재가 흔해서 돌만 뒤집으면 한두 마리씩 나왔다. 그것을 잡아 구워먹는 것도 별미였다. 피난에서 돌아온 뒤 나는 그 시절이 오히려 재미있게 기억으로 남아 "피난 다시 가자"고 보챘을 정도로 철부지였다.

1951. 5. 25. 길바닥에 나뒹구는 어느 병사의 시신.
 1951. 5. 25. 길바닥에 나뒹구는 어느 병사의 시신.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1950. 11. 14. 함흥 덕산 광산, 늘려져 있는 400여 구의 시신 가운데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
 1950. 11. 14. 함흥 덕산 광산, 늘려져 있는 400여 구의 시신 가운데 아들을 찾는 어느 아버지.
ⓒ NARA,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태그:#한국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