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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점퍼를 입은 국회의원이 여유롭게 무대 위로 걸어 나온다. '뉴서울예술공사'의 회장(김용진)이기도 한 그는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광화문 맞은편에 들어서는 18층짜리 명품빌딩에 초대형 옥외 광고를 그리라는 것.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이다. 회장은 단호히 말한다. 

 

"Just Do It." (하면 된다.)

 

정치보다 웃긴 연극, <칠수와 만수>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억압받고 암울한 현실을 무대 위에서 과감히 펼쳐 1986년, 초연 당시 80년대 연극으로는 이례적으로 400여 회나 공연됐다. 이듬해 제23회 동아연극상 연출상과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연극상, 연출상을 휩쓸었다. 1988년에는 박광수 감독이 안성기·박중훈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주목을 받았다. 스타 등용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출연 배우도 쟁쟁했다. 문성근, 강신일, 유오성 등 이름만 대도 알만한 스타들이다. 이 화려한 경력을 가진 연극이 '2012년 버전'으로 관객을 찾았다.

 

"시대는 변해도 사람들의 인생은 비슷한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유연수 연출의 말처럼, 2012년 버전도 우리 사회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회장이 지시한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칠수(송용진)와 만수(진선규)는 밤낮없이 일한다. 돈이 절박한 이들의 삶은 13층 높이에서 곤돌라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는 모습만큼이나 아슬아슬하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둔 칠수는 집 나간 여동생을 애타게 찾고 있고, 웨이터, PC방 등 안 해본 일 없는 만수는 형이 술 먹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근심이 더 깊어졌다.

 

현실이 초라하다고 꿈이 없는 건 아니다. 칠수는 슈퍼스타K에서 우승하는 인생역전을 꿈꾸고, 만수는 조그마한 가게 사장님이 되는 게 목표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통쾌하게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어느 날,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옥상에 오른 칠수와 만수는 '사고'를 치고 만다. 들고 있던 페인트통을 실수로 놓치고 만 것. 페인트통은 시위를 진압하러 가던 경찰차에 명중했고, 경찰은 이들은 시위 선동 세력으로 오인한다. 경찰이 만수가 들고 있던 생수병을 '휘발유'로 오해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고, 그 뒤로 'Just Do It!'이라는 글자가 전광판에 희미하게 비친다.

 

연극이 초연됐던 80년대와 달리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사람의 인생은 늘 비슷한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회사가 잘 돼야 여러분도 잘된다"는 말은 대부분 기업들의 단골멘트가 됐지만, 청년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돈 없고, 빽 없는 청년들은 여전히 '꿈'과 거리가 멀다. 잠깐 돈을 벌기 위해 '비정규직'으로 일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되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연극 <칠수와 만수>가 우리 곁에 돌아온 것도 이 변하지 않는 현실을 제대로 비틀고 싶어서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80년대 원작이 큰 인기를 끌었던 건, 독재 정권하에서 얘기하지 못하는 현실을 통쾌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사도 직접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4대강을 누가 저렇게 만들었냐"라는 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오히려 직접적인 대사전달이 촌스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연극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Just Do It!'에 감춰진 진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래서 칠수와 만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 흘러나오는 가요 <사노라면>이 더욱 슬프게만 들린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덧붙이는 글 | * 연극 <칠수와 만수> : 7월 8일까지 대학로 문화공간필링 평일 8시/ 토요일 4시, 7시/ 일요일, 공휴일 3시, 6시(월요일 공연 없음).


태그:#박원순, #칠수와 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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