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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아가는 창의적인 민주시민 육성'을 교육지표로 내 건 경기도교육청 청사 현관
 '더불어 살아가는 창의적인 민주시민 육성'을 교육지표로 내 건 경기도교육청 청사 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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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이 경기도교육청(교육감 김상곤, 아래 도교육청)을 방문했다. 학교폭력과 관련해 도교육청이 도내 초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진정이 하루 전 접수돼 이를 조사하기 위해서다. 전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일 먼저 만들고 학생인권이 학교에 정착하도록 노력해왔다는 도교육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교육청은 지난 6월 25일께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학생 맞춤형 기초 설문 조사 계획 알림'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통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기도교육감 명의의 설문지와 설문 결과를 정리·보고하라는 엑셀 문서 파일을 관할 초중고교에 내려보냈다.

이 설문조사는 이미 지난 12일께 1차로 시행했는데 당시 일부에서 인권침해 등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도교육청은 그러한 지적에도 같은 내용의 공문을 25일 각 초중고교에 다시 보낸 것이다.

이 설문지에는 학생의 성별, 학교, 학년, 반, 번호, 이름 등의 개인정보를 모두 쓰고 문항에 답을 쓰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사가 학생 개인별 설문 문항에 대한 답변 내용을 일일이 엑셀파일에 기록하도록 했다. 이를 종합하여 학급별, 학년별, 학교별로 자료를 모두 정리해 보고하라는 것. 이 같은 설문 조사를 할 때에는 개인의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익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인데 도교육청은 이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도교육청의 공문대로 하면 A학교 B학생이 각 문항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를 모두 데이터화하는 방식으로 전 학급, 전교생의 문항별 개별 응답 내용을 일일이 자료로 정리해야 한다. 사실상 198만여 명에 이르는 경기도 내 초중고교생들의 개인정보와 개별 응답 내용을 모두 엑셀 파일에 데이터화 하겠다는 비교육적·반인권적인 무서운 발상을 한 것이다.

도교육청은 공문에서 이 설문의 목적을 "학교폭력 미리 살피기로 인권이 존중되는 교실 만들기"라고 밝혔지만 이 같은 설문조사가 학생과 교사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도 있다는 감수성조차 지니지 않고 있었다.

'학교폭력 미리 살피기'가 또 다른 '폭력'이 되는 상황

설문 문항에는 전체 학생들을 잠재적인 학교 폭력의 가해자나 위험적 행동 징후를 지닌 대상으로 전제하여 친구가 친구를 고발하도록 하고 개인의 취약점을 밝히도록 유도하는 비교육적이고 반인권적인 문항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 경기도교육감 명의의 학교폭력 관련 설문지 설문 문항에는 전체 학생들을 잠재적인 학교 폭력의 가해자나 위험적 행동 징후를 지닌 대상으로 전제하여 친구가 친구를 고발하도록 하고 개인의 취약점을 밝히도록 유도하는 비교육적이고 반인권적인 문항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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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 항목에 이르는 설문문항은 더욱 심각하다. 도교육청이 제시한 '학교 폭력'과의 상관성이나 '인권이 존중되는 교실 만들기'와는 거리가 멀고 학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설문 문항에는 전체 학생들을 잠재적인 학교 폭력의 가해자나 위험적 행동 징후를 지닌 대상으로 전제하여 친구가 친구를 고발하도록 하고 고해성사하듯 개인의 취약점을 밝히도록 유도하는 비교육적이고 반인권적인 문항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또 지극히 개인적이고 민감한 정보에 해당하는 질문을 제시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항목도 있었다.

"야한 영화, 동영상, 사진을 본 적이 있다"와 같은 질문은 학교 폭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지나치게 개인의 신상을 파고드는 설문 내용에 해당한다.

'무단결석을 자주 하는 친구가 있다'와 같은 문항 역시 무단결석과 학교폭력의 상관관계를 의심하게 할 뿐 아니라 무단결석 여부는 담임교사나 학교를 통해 확인할 문제이지 학생들에게 설문을 받을 내용이 아니다. 학교 현실에 대한 배려나 판단이 전혀 없이 제작된 설문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강영구 변호사(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는 이와 관련해 "야한 영화나 동영상, 사진 등을 본 적이 있느냐고 학생들에게 실명으로 대놓고 묻고 이를 자료화한다는 것은 민감 정보를 건드린 걸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민감 정보는 개인정보보호법상 수집할 수 없다. 더욱이 초·중학생과 같이 만 14세 미만의 경우 법적 대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최소한의 정보 수집 요건도 갖추지 않은 (도교육청의) 설문조사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도교육청의 이번 설문조사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교원단체와 인권관련 시민단체가 경기도 학생인권옹호관과 도교육청에 설문 조사를 중단하라는 문제제기와 함께 국가인권위에 민원 진정을 넣자, 도교육청은 6월 27일 오후 결국 백기를 들었다. '업무연락'시스템을 통해 관할 초중고교에 설문 조사를 중단·폐기하라는 지침을 보낸 것이다. 그마저도 교원단체와 인권관련 시민단체가 강력히 요구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학교 폭력 예방을 명분으로 한 설문조사로 198만여 명에 이르는 경기도 내 초중고교생들에게 친구를 고발하라고 유도하고 개인의 민감 정보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화하려고 했던 도교육청의 의도는 일단 중지됐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 학교가 설문조사는 물론 통계자료 입력까지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각 학교에서는 '뒷북행정'이라는 비난이 일었고, 해당 학교들에서 이 자료를 활용하여 학생들을 가려내고 처벌하는 자료로 삼을 여지도 충분히 남아 있다.

'인권교육감' 자처했던 김상곤 교육감, 새로운 의지 필요

도교육청의 공문대로 하면 사실상 198만 여명에 이르는 경기도내 초중고교생들의 개인정보와 개별 응답 내용을 모두 엑셀 파일에 데이터화 하게 된다. 이 같은 설문 조사를 할 때에는 개인의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익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인데 도교육청은 이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도교육청의 공문대로 하면 사실상 198만 여명에 이르는 경기도내 초중고교생들의 개인정보와 개별 응답 내용을 모두 엑셀 파일에 데이터화 하게 된다. 이 같은 설문 조사를 할 때에는 개인의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익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인데 도교육청은 이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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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관계자와 일부 인권옹호관들은 도교육청의 이런 행위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진단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학생들에게 망신을 주는 등 설문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학생 개개인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데이터화 하는 방식의 설문조사와 자료 수집은 마땅히 중지해야 한다. 일선 학교들에서 이미 완료된 자료를 활용해 학생들을 문제시하거나 처벌하는 등의 일이 있어서도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도교육청 생활인권 담당자들의 인권감수성 문제는 여러 차례 공식·비공식적으로 지적이 된 바 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부각된 도교육청의 인권감수성 부족을 직접 질타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도교육청은 지난 5월부터 학교폭력 전담부서로 학교인권지원단을 설치·운영해왔다. 2년 한시기구로 설치된 학교인권지원단은 생활인권 담당과 학교폭력 담당으로 역할을 나누어 업무를 진행해왔다.

지난 1월 30일 오전 경기도 수원 경기도교육청에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학생인권 보장은 올바른 교육의 첫 걸음으로 교육과학기술부는 서울학생인권조례 관련 소송을 즉시 취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지난 1월 30일 오전 경기도 수원 경기도교육청에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학생인권 보장은 올바른 교육의 첫 걸음으로 교육과학기술부는 서울학생인권조례 관련 소송을 즉시 취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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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논란이 돼 인권위의 조사까지 받게 된 학교폭력 관련 설문지가 바로 이 학교인권지원단 학교폭력담당에서 시행한 일이다. 학교 폭력 설문과 관련한 인권 침해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논란은 학교인권지원단의 역할과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이번 사태는 도교육청이 설문문항과 조사형식에 대해 인권옹호관이나 인권관련 시민단체 등에 한 번만 자문을 구했어도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학교폭력에 대한 설문 조사는 그것대로 진행하면서 설문에 응하는 학생들도 충분히 존중해 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생인권 전반을 책임지는 도교육청 학생인권지원단은 그러한 책임과 역할을 모두 스스로 포기했다. 그 결과 도교육청이 앞장서서 198만여 명에 이르는 도내 초중고생 신상털기를 펼친 꼴이 되고 말았다.

인권위의 조사가 끝나기 전에 도교육청이 논란이 된 설문조사를 일단 중단시켰기 때문에 인권위 차원의 다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학생인권존중을 전면에 내세웠던 도교육청의 구겨진 체면을 되살리기에는 시간이 매우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담당자들의 충분한 인권감수성과 그에 기초한 책임 있는 업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명예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인권교육감을 자처했던 김상곤 교육감의 새로운 의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태그:#인권조례, #학교폭력, #김상곤, #경기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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