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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인이나 바꾸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개인 한 명 한 명 연대의 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초 한일병원 식당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던 한 조합원의 말이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이자 '엄마'였다.

한달을 넘긴 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이 파업에 동참한 조합원 역시 아줌마들이다. "아줌마들이 뭘 알겠느냐"는 전주대·온리원 측의 조롱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들의 파업의지는 점점 강해져만 간다. 순박하고 평범한 우리 엄마들이 어쩌다 파업에 나서게 됐을까? 누가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녀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기자 주>

전주 팔달로에서 삼보일배를 하는 전주대 비전대 청소노동자 및 민주노조 평등지부
 전주 팔달로에서 삼보일배를 하는 전주대 비전대 청소노동자 및 민주노조 평등지부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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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오후 5시, 전주시 팔달로에서는 삼보일배 행진이 이뤄진다. 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들은 지난달 15일부터 삼보일배 행진을 하고 있다. 한낮에 달궈진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아스팔트. 우리의 엄마뻘 되는 여성들이 그곳에 몸을 낮추고 있다. 청소노동자 중의 한 명인 이옥순씨를 지난달 18일 만나보았다(기사를 작성한 2일 현재까지 이들이 처한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이옥순(59)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달 전주대학교 총장실에서였다. 이것저것 묻는 기자에게 설명을 참 조리 있게 잘 해주었다. 전주대와 온리원의 관계, 최저임금, 노동법 등 술술 대답해주었다. 원래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최근에 알게 된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옥순씨는 정말이지 평범한 주부였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자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씨가 전주대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2002년. 그 전까지는 전주의 한 건물에서 청소했다. 전주대로 옮긴 이유는 월급이 10만 원 정도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전주대의 청소용역을 '성민기업'이라는 곳에서 담당했어요. 그게 조금 지나 온리원으로 바뀌었죠. 온리원의 이 부장님이라는 분이 일본에 출장 차 다녀오시더니 저희에게 선물을 돌렸어요. 긴 젓가락하고 바늘쌈이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데요. 그 기억이 나네요."

왜 우리가 온리원 청소를?...'같은 회사니까'

2002년부터 전주대에서 청소를 해온 이옥순씨. 파업이 이렇게 힘들고 길어질 줄 몰랐다고했다. 노조를 안 만들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하지만 평생 부러워하면서 살았을 거라고 이옥순씨는 말했다. 후회는 없단다.
 2002년부터 전주대에서 청소를 해온 이옥순씨. 파업이 이렇게 힘들고 길어질 줄 몰랐다고했다. 노조를 안 만들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하지만 평생 부러워하면서 살았을 거라고 이옥순씨는 말했다. 후회는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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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들은 그 무렵부터 생활용품 판매점인 온리원 매장의 정리, 청소까지 떠맡아야 했다. 그때가 2002~2003년 무렵이었다. 본래 대학교 청소만이 주 임무였던 이들은 어느 지역에 온리원 매장이 생긴다고 하면 불려 나가 온종일 물건을 진열하고 포장하고 청소해야 했다.

온리원 매장에 차출된 인원의 업무는 남은 인원들끼리 나눠서 충당해야 했다. 노동의 강도도 세졌다. 특별수당도 없었다. 온리원 매장 차출은 주말이라고 예외 되지 않았다. 전북 이외의 타 지역에 불려 나갔을 때, 하루 종일 일한 뒤 손에 쥐어지는 돈은 2만~3만 원. 새벽 6시에 출발, 저녁 9시 귀가를 가정했을 때, 시간당 약 1800원 가량에 해당하는 임금이었다.(3만 원 기준)

"우리 일은 대학교 청소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온리원 매장까지 우리가 해야 되냐고 물었더니 '같은 회사니까'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대학교 각 학과 실장님들한테 부탁했어요. 우리 그 일(온리원 매장 청소 등) 좀 안 하게 해달라고. 그러면 그분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어서 어떡할 수가 없대요."

결국, 자신뿐이었다. 자신들을 스스로 지켜내고,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2011년에 노조를 결성하고, 최소한의 기본 권리는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리원 회사 측에서는 긴급히 또 하나의 노조를 만들어, 며칠 안에 200명에 가까운 노조원들을 끌어모았다. 처음 함께 노조를 결성했던 조합원들도 어느 틈엔가 저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34인의 외로운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뜻을 세우면 (회사에서)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줄 줄 알았어요. 이렇게 철벽일 줄 정말 몰랐어요."

노조 만들면 소통할 수 있을 거라 기대 

회사로부터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할 줄 몰랐다는 이옥순씨. 그 말을 하며 이씨는 끝내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이씨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비정상일까. 그녀의 말에서 안타까움과 실망감이 묻어난다.

물론, 두 달의 시위로 세상이 완전히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문은 열릴 줄 알았다. 그들도 귀는 열어둘 줄 알았다. 하지만 얘기 좀 하자고 밖에서는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데, 안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의 사람이 굶어 죽든, 추워 죽든 내 알 바 아니라"는 회사 측의 태도에 이씨는 이제 분노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환멸마저 드는 것일까. 

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는 6월 15일부터 전주 팔달로에서 매일 삼보일배를 하고있다.
 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는 6월 15일부터 전주 팔달로에서 매일 삼보일배를 하고있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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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를 비롯한 청소노동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은 역시 경제적인 문제다. 다행히 이씨의 자녀는 모두 취직했다. 일찌감치 시집간 딸은 현재 카타르에서 살고 있고, 장학금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둘째 아들은 얼마 전 국내 한 회사에 취업했다.

"지난번에는 제가 딸한테 그랬어요. 엄마 신용불량자 되게 생겼다고. 전화요금도 못 내고, 전기요금도 못 내고 있어요. 그 말 듣더니 딸이 '엄마, 일단 60만 원 보내줄게. 그리고 그거(파업) 그만해'라고 하데요. 아들도 첫 월급 타면 얼마간 부쳐준다고 하고. 지금 그 돈으로 근근이 지내고 있어요."

'결국, 그래 봐야 깨지는 건 노조뿐'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꿈쩍 않는 이씨지만 경제적인 압박 앞에서는 가끔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압박과 궁핍한 현실에 무릎 꿇는 것을 회사 측에서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씨는 그럴 때마다 더욱 마음을 굳게 먹는다. 신용불량자보다 이씨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이런 '꼼수'다.

전주대 비전대 청소노동자의 파업에 관한 전단지를 읽어보고있는 한 시민
 전주대 비전대 청소노동자의 파업에 관한 전단지를 읽어보고있는 한 시민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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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참 힘드네요.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진짜예요. 다른 노조 보면서 부러웠거든요. 왜 우리한텐 노조가 없을까. 부러워하기만 하면서 살 바에 좀 힘들더라도 노조활동을 하는 게 훨씬 낫죠. 만약, 노조를 안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지금껏 그래 왔듯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았을 것이다. 부당한 요구를 당해도 그저 가슴만 치면서 혹은 누군가 대신 우리 억울함을 풀어주길 막연히 기대하며. 하지만 이씨는 노조를 만들어 활동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노조를 만들면 회사와의 소통이 잘 될 거라 믿었던 이옥순씨의 꿈은 너무 이른 것일까, 늦은 것일까. 이씨는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함께 하는 33인이 있기에 그 답만큼은 성급히 내릴 수가 없다. 하루하루에 충실할 뿐. 인터뷰를 마친 이씨는 모내기를 도와주러 가야 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덧붙이는 글 | 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관심입니다. 더불어 경제적인 후원도 절실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태그:#전주대 비전대 청소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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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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