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을 오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성삼재휴게소까지 차로 이동해서 편안하게 노고단으로 가는 코스와, 힘겨운 산행을 통하여 오를 수 있는 화엄사계곡 코스와 왕시루봉 코스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산길이 화엄사계곡 코스로 비교적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산꾼들에게 노고단의 관문과도 같은 화엄사계곡은 주능선 너머의 뱀사골 코스와 더불어 지리산 주능선 종주 코스에 속한다. 성삼재까지 차가 드나들면서 지리산 종주 코스도 노고단에서 중산리나 대원사로 하산하는 게 일반적인 코스가 되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종주는 아닌 셈이다.
7km에 달하는 화엄사계곡에는 큰절 화엄사와 그 부속 암자들이 골짜기 곳곳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어 불향에 흠뻑 젖게 만든다. 구층암, 길상암, 연기암, 청계암, 미타암, 내원암, 금정암, 지장암 등의 8암자가 계곡을 따라 제각기 터를 잡고 있다.
계곡 이편에 있는 길상암과 구층암을 제외하면 나머지 암자는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다리를 건너 남악사에서 출발하면 모두 만날 수 있다. 암자 가는 길은 차량이 다니는 제법 넓은 길이지만 계곡으로 난 등산로는 인적이 드문 편이다. 흔히 '연기암 가는 길'이라고 일컫는 이 산길은 산꾼들도 지리산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로 손꼽는 곳이다.
시를 감상할 수 있고 자생식물 관찰원이 들어선 시비동산을 가로지르면 남악사가 있다. 남악사는 옛날 국가적 차원의 제사가 치러진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 1969년에 구례군민들이 새로 지은 것이다. 지리산 오악신앙이 뿌리 깊게 전해오는 남악사는 이제 국가 차원의 제사는 지내지 않고 매년 봄 곡우(4월 20일경) 때에 '지리산 약수제'를 열어 제를 올리고 있다.
남악사를 잠시 둘러보고 화엄사 일주문 쪽으로 나 있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산길로 향했다. 예전에는 등산로가 화엄사 담장 바로 옆으로 나 있었지만 지금은 화엄사 담장을 계곡 건너로 흘깃 보며 걸어야 한다.
흙길은 아주 잠시, 이내 돌길이다. 이 반듯한 돌포장길은 화엄사계곡 길을 걷는 내내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투박한 돌밭 길로 변하기도 한다. 겨우 몇 걸음을 뗐을 뿐인데 울창한 숲이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의 소리도 숲에 점차 잦아들고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남았다.
대숲이 나타났다. 빽빽한 대나무가 긴 터널을 이루어 길은 구불구불 이어졌다. 대숲 가운데에 있는 대나무쉼터에는 바싹 마른 댓잎들이 간밤에 내린 비에 젖어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올벚나무가 인상적이다.
대나무 숲길이 끝나자 갑자기 앞이 훤해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바위들이 나타났다. 누군가 큰 바위에 새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잠시 변화를 준 숲은 다시 울창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숲 끝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니 인기척이라기보다는 돌길에 닿는 낮은 발자국 소리이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건 노고단에서 내려온 산꾼이었다. 옆을 지나는가 싶더니 이내 숲으로 총총 사라졌다.
화엄사계곡 길은 이제 호젓한 길이 되었다. 성삼재로 뚫린 관광도로 덕분에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이곳으로 노고단을 오르지 않고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찾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보면 안타까운 일이고 이 계곡을 보면 다행한 일이다.
계곡 물소리가 들렸다 사라졌다 반복하더니 돌 포장길 끝에 '용소' 안내문이 나왔다. 옛날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용소에서 화엄사 아래 황전리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계곡으로 내려가다 저도 모르게 '애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생각보다 폭포가 너무나 앙증맞아서였다. 그나마 지리산 다른 계곡에 비해 경관이 뒤처지는 화엄사계곡에서 눈길을 끄는 자그마한 폭포이다.
맑은 폭포수에 잠시 땀을 식힌 후, 다시 숲으로 들어섰다. 한 여인이 나타났다. 워낙 조용조용 발을 내딛어서일까. 순식간에 여행자의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맨발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양이 경건하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촉촉한 돌길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하늘의 빛과 땅의 기운, 숲의 정령을 온몸으로 그녀는 받아들이는 듯했다. 사뿐사뿐 그렇게 맨발로 걸어 그녀는 숲으로 사라졌다.
돌길이 조금 지겨울 즈음 쉼터가 나왔다. 서어나무가 많아 서어나무골로도 불리는 이 일대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연기암 가는 길과 노고단 가는 길. 그러나 이내 알게 된다. 느닷없이 시멘트 포장도로가 앞에 나타나 적이 당혹스럽고 길은 다시 마주치게 된다는 사실을. 여태까지의 한갓지고 서정적인 돌길은 이곳에서 끝이 나고 연기암에 이르게 된다.
해발 560m에 자리한 연기암은 근래에 다시 지어졌다. 깊은 산세와는 달리 건물이 다소 위압적이라 암자를 보는 여행자의 마음은 착잡하다. 맑은 말이면 산을 비집고 들어오는 섬진강의 풍광도 오늘은 안개에 가렸다. 이래저래 답답했다.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에는 계곡길 대신 도로를 택했다. 암자로 가기 위해 닦은 길이라 시멘트길과 흙길이 섞인 길이다. 계곡길에 비해 밋밋해 다소 지루한 맛도 없지 않은 이 길도 마음만 느긋하면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다. 청계암, 미타암, 내원암, 금정암 등 암자들이 중간 중간 쉼표 역할을 하고 숲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화엄사가 장엄하다.
계곡 등산로로 연기암 가는 길은 2.3km, 우회하여 산으로 난 도로는 3.9km이다. 이곳을 몇 번 다녀간 여행자의 경험에 따르면 오를 때에는 계곡 등산로로, 내려올 때에는 도로를 택하는 게 좋다. 이 길은 초보자도, 아이도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