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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소위 '깡촌'이라 불리는 안면도 신야리에는 집 한편에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는 손희진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 깡촌 대장간 시골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소위 '깡촌'이라 불리는 안면도 신야리에는 집 한편에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는 손희진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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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건대 인류의 업적 중 하나를 손꼽자면 '불'을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인류사에서 '불'은 가히 '위대한 발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런 불을 다루는 직업 중 아마도 대장장이는 가장 오래된 밥벌이 수단일 것이다.

충남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 68-1번지. 시골마을서도 소위 '깡촌'이라 불리는 이곳에 대장간이 있다.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들어서면 움직이기도 버거울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지만 가마, 모루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영락 없는 대장간이다.

깡촌서 대장간 운영... "풀무질로 일 배워"

깡촌 대장간을 지키는 대장장이는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손희진(76) 할아버지다. 지금이야 세월이 변해 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곳에 가야 대장간을 볼 수 있지만 1980년 이전만 해도 대장간은 주변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제는 희귀한 직업이 된 대장장이. 안면도의 작은 시골마을서 그는 60년째 유일한 대장장이로 여전히 쇠를 내리치고 있다.

대장간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시골 집 한편에 직접 지었다. 50여 년 전 지금은 마늘 밭이 된 기존의 대장간을 허물었지만 가마와 갖가지 도구는 그대로 옮겼다. 그가 알기로는 조부 때부터 쓰던 물건이다.

쇠를 다루는 기술도 조부에게 배웠다. 지금은 농사도 기계로 짓는 시대가 돼 일감도 줄어 호미와 낫, 해녀들이 물질할 때는 쓰는 꼬챙이, 조새(굴이나 조개 따위를 따는데 쓰이는 도구) 등을 만들거나 재가공하는 정도다.

조부가 대장간을 운영하다보니 그는 자연스레 어릴 적부터 대장간이 놀이터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도 대장간은 집 옆에 있었다. 기억하기로 당시 대장간은 썩 잘 됐다. 일꾼도 두 서너 명 정도 고용할 정도였다. 가끔 조부는 품삯을 아끼기 위해 어린 그를 일꾼으로 쓰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배움보다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시절이었지. 그래서 (초등)학교를 갔다가 오면 할아버지께 혼났어. 할머니는 가끔 밥도 안 줬다니까. 하하."

대장간서 그에게 맡긴 첫 번째 일은 가마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넣어주는 '풀무질'이었다. 대장간은 쇠를 불로 다루어 도구를 만드는 곳이어서 혹여 가마의 불이 꺼지거나 온도가 낮아지면 낭패였다. 당시는 농기계뿐만 아니라 생활도구까지 대장간서 만들어 쓰던 시절이어서 하루 주문량이 꽤 됐다.

손 할아버지가 만든 조새는 동네서 알아주는 명품이다. 가을이면 갯일을 나가는 동네사람들의 한 손에는 할아버지표 조새가 하나쯤 들려 있다.
▲ 명품 조새 손 할아버지가 만든 조새는 동네서 알아주는 명품이다. 가을이면 갯일을 나가는 동네사람들의 한 손에는 할아버지표 조새가 하나쯤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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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유일의 대장장이, 이동식 대장간도 운영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다가 첫 작품을 만든 것은 17살이 되던 해였다. 그러나 기쁨보다 슬픔이 컸다. 그해 그는 선친을 여의었다. 조부가 어린 그에게 일찍이 쇠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하게 됐다.

대장간을 하면서 그는 농사도 지었다. 아니 농사를 지으면서 대장간을 운영했다고 하는 표현이 옳다. 언제나 그에게 대장장이는 부업이었다. 그래도 실력은 꽤 좋았다. 지금도 대장간은 밥벌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밖에서도 주문이 많았지. 안면도에서는 대장장이가 유일하게 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벌이도 좋았어. 옛말에 '목수는 깎아내서 못살고 대장장이는 늘려서 잘 산다'고 하잖어. 실력도 좋아 지금도 마을서 조새나 꼬챙이는 아직도 내 것이 최고라고 한다니께. 허허."

주문량은 꾸준했지만 그렇다고 재산을 늘릴 정도는 아니었다. 일이 고되다 보니 피로를 술로 푸는 날이 많았다. 일꾼이 필요한 날이면 품삯도 지불해야 했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데 사용하는 석탄을 운반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부족하지 않은 정도의 수준. 그게 대장장이의 벌이었다.

물론 한때 돈을 벌기 위해 이동식 대장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주로 인근의 섬 마을을 돌며, 주문 받은 물건을 만들어줬다. 일이 많으면 한 섬에서 열흘이 넘도록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이동식 대장간은 얼마가지 못해 접어야 했다. 당시 교통수단은 돛단배가 전부였다. 그래서 기상악화로 섬에 고립되면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면 버는 것보다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나가는 것이 더 컸다. 결국 이동식 대장간은 불과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빨갛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매질하는 노부부. 할머니의 매질이 쇠를 넓게 펴는 역할을 한다면 할아버지는 모양을 만드는 매질을 한다.
▲ 매질하는 노부부 빨갛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매질하는 노부부. 할머니의 매질이 쇠를 넓게 펴는 역할을 한다면 할아버지는 모양을 만드는 매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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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대장장이 삶, 돛단배 타고 석탄 조달하기도

마음을 고쳐먹고 예전처럼 집 한편에서 대장간을 운영했지만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벌이가 나빠졌다. 무엇보다도 교통이 문제였다. 석탄을 조달하려면 돛단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홍성까지 가야했다.

"(홍성군) 광천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배(장날에 맞춰 운행되는 배)를 타고 가서 석탄을 사왔다. 그땐 기차도 석탄을 지펴서 운행했는데 기찻길에 다 태운 석탄을 버렸어. 근데 그 속에 다 타지 않은 석탄이 있어서 그걸 주어다가 파는 아줌마들이 기차역에 많았지. 그걸 사다가 가마에 불을 지폈지."

세월이 흘러 지금은 경기도 인천에서 택배로 석탄을 사다가 가마에 불을 지피는 그는 어느덧 60년째 대장간을 운영하는 명인이 됐다. 그러나 대장간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잦아들었다.

위안을 삼자면 아직도 마을서 그의 작품을 찾는 이들이 꾸준하다는 것. 그리고 안면읍내 철물점서도 여전히 그에게 물건을 의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사일보다 갯일을 나가는 날이 많은 가을에만 주문이 집중되고 있다. 주문도 새 것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보다 수리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냥 취미생활로 이 일을 하는 정도야. 비싼 돈 주고 산 것들 나한테 가져오면 싼 가격에 새 것처럼 수리해주니까 찾아오지.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나한테 우스갯소리로 오래 살라고도 해. 아니면 허구한 날 새 것만 사야 하니까.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일을 하고 싶은 게 소원이야."

쇠달구는 할아비, 매질하는 할매... "대장간 없어지는 것 아쉬워"

17살에 결혼한 노부부는 슬하에 일곱 자식을 낳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착한 심성과 세심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닥 한다. 반면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그저 웃을뿐...
▲ 쇠 달구는 할아비, 매질하는 할매 17살에 결혼한 노부부는 슬하에 일곱 자식을 낳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착한 심성과 세심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닥 한다. 반면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그저 웃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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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진 할아버지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장가를 갔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조부모 슬하에 자란 탓에 결혼을 서둘렀다. 평생 배필은 중매로 만났다. 보령시 '장고도'라는 섬 마을 처녀였던 최송순(76) 할머니는 착한 심성과 꼼꼼한 성격의 손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가업을 이어받은 것도 여린 성품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할머니의 설명이다. 꼼꼼한 성격은 일하면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없어 누구나 말하는 성격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남들에게 싫은 소리 못해 손해를 보기도 일쑤였다.

주문받은 물건을 만들어주면 간혹 차일피일 결제를 미루는 집이 있었다. 그러나 외상값을 받으러 나간 할아버지는 언제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늘 '차마 외상값 달라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며 매번 같은 변명과 멋쩍은 웃음을 지었단다.

반면 할아버지는 자식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부부는 슬하에 일골 남매를 낳게 됐다. 할아버지는 선친이 형제자매가 적었던 탓에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단다.

남편이 60년간 대장장이로 살다보니 할머니도 절반은 대장장이가 다 됐다. 지금도 꼬챙이나 곡괭이 같은 큰 물건을 만들어야 할 때면 매질은 할머니 몫이다. 매질은 잘못하면 달궈진 쇠가 몸에 튀어 화상을 입을 수 있어 섣부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대장장이를 하면서 병을 얻었다고 한다. 지난해 할아버지는 병원치료 중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언젠가 어디서 봤는데 탄광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병에 잘 걸린다고 하데. 탄가루를 많이 먹어서. 아마도 그래서 나도 그런 것 같아. 근데 고혈압처럼 약만 잘 먹으면 괜찮다고 의사가 말하데. 요즘은 약도 안 먹을 정도로 거의 회복했어."

후회 없는 대장장이 삶이었지만 한 가지. 할아버지는 일곱 남매 중 가업을 이어받겠다고 나서는 자식이 없어 서운하다고 한다.

"한 놈이라도 (대장장이를) 했으면 했는데…. 어쩌다 집에 와도 거기(대장간)는 얼씬도 하지 않더라고. 그게 좀 아쉬워. 내가 죽으면 거기(대장간)도 없어질 텐테."

3대째 사용하고 있는 가마에서 호미가 사이좋게 달궈지고 있다. 끝이 뭉툭한 호미들은 할아버지의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바뀐다.
▲ 사이좋은 호미 3대째 사용하고 있는 가마에서 호미가 사이좋게 달궈지고 있다. 끝이 뭉툭한 호미들은 할아버지의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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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대장간, #태안, #안면도, #대장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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