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가슴 아픈 사유로 정년이 보장된 학교를 퇴직하고, 강원도로 내려온 지도 벌써 8년이 넘었다. 이곳에 내려온 뒤로 나는 거의 매일 산책을 하고 있다. 나의 산책로는 일정치 않고 계절이나 그날 날씨, 그날 사정(주로 집필 계획)에 따라 다르다.
강원도로 내려오다안흥에 살았을 때는 세 길로 다녔다. 하나는 송한리 가는 길인데, 주로 봄에서 초여름에 자주 다녔으며 이 길은 잎갈 나무 숲길로 녹음이 좋다. 특히, 초여름 산책길에는 길가의 들꽃 개망초가 활짝 핀 채 나를 반겨줘서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또 다른 길은 일감이 많은 날이나 시간의 여유가 없거나 다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 자주 이용하는 길이다. 말무더미 마을 오솔길을 한 바퀴 돈다. 밤나무 숲이 우거진 이 오솔길은 아주 정감이 가는 숲길로 가을에는 길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 씹는 즐거움이 있다. 그 즈음 산책길에는 다람쥐들을 자주 만나는데, 그럴 때면 그들의 양식을 내가 뺏는 것 같아 알밤 줍는 일을 삼간다. 사실 야생동물들의 먹이를 사람들이 가로채어 그들의 종족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른 봄이면 산이나 들의 야생동물 먹이조차도 사람들은 산나물 축제네, 뭐네, 하면서 죄다 갈퀴질하여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래도 옛 사람들은 들짐승 몫을 남기기도 하지만, 현대인들은 산비탈에 승용차를 대놓고는 큰 부대자루로 싹쓸이를 해가고 있다.
들판에 벼들이 누렇게 황금빛을 띄울 무렵이나 주천강 강물이 꽁꽁 언 한겨울에는 주천강 강둑을 산책한다. 무르익은 들녘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면 무언지 내 마음조차 넉넉해지고 겨울날 중무장을 하고, 원시 태고의 강바람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그렇게 상쾌해질 수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더니 안흥 말무더미 마을 생활도 인연이 다하여 이태 전 원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 온 뒤로 산책길은 매우 다양하다. 가장 자주 찾는 길은 구룡사 길이다.
우산동 버스정류장, 또는 원주 중앙시장 버스정류장에서 41번 시내버스를 타면 30여 분 만에 구룡사 어귀 버스 종점에 이른다.
매표소에서는 사찰입장료를 받지만 경로우대로 늘 면제를 받는다. 늘 면제받기도 미안한데 이제는 얼굴까지 익어 인사까지 받으니 더욱 미안하기 짝이 없다.
거기서는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있지만 한 번도 비로봉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 대체로 구룡사 들머리 시내까지나 나무의자까지만 오른다. 오가는 길에는 늘 산새들이 뭐라고 조잘거리는데 그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시냇가에서 잠시 손을 담그기도 하고 나무의자로 돌아와 가지고 온 책을 읽거나 때로는 머리를 등받이에 기댄 채 숲으로 우거진 틈새로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시간이 넉넉한 날이나 주머니 사정이 두둑한 날은 강릉행 시외버스를 타고 도중 진부에서 내려 다시 오대산행 버스로 갈아탄다.
주로 월정사 일주문 앞에서 내려 전나무 숲길을 걷는다. 그럴 때면 다람쥐란 놈이 앞길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닌다. 숲길을 지나 월정사 경내에 이르러 적광전 부처님에게 삼배를 드린 뒤 불유각(佛乳閣)으로 가서 바가지로 물을 받아 들이켠다. 간장까지 시원하다.
시간 여유가 더 있는 날은 상원사 행 버스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지만, 그렇지 않는 날은 진부로 돌아와 단골 메밀부침개 집을 찾아 메일부침과 감자전을 산다. 내 아내는 입이 까다롭지만, 이집 부침개만은 좋아한다.
최근 새로 개발한 산책로는 치악산 남쪽 코스다. 신림을 지나 상원사 들머리까지 가거나 금대계곡, 아니면 치악산 자연휴양림을 찾는다. 날씨가 좋은 날은 읽던 책을 가지고 가서 개울가에 앉아 책장을 넘기다가 싫증이 나면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원주시내에서 외곽으로 오가는 버스의 시간은 종잡을 수가 없다. 재수가 좋은 날은 5분 정도 기다리면 되지만 어떤 날을 30분, 또 어떤 날을 1시간도 기다려야 하고, 아주 재수 없는 날은 막차를 놓쳐 깜깜한 밤길을 걷거나 마음씨 좋은 분의 신세를 지기도 한다.
걸으면 저절로 고쳐집니다
언젠가 탁발 순례 길에 만난 도법 스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정신으로나 육체로나 환자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병은 걸으면 저절로 고쳐집니다. 걸으면 자기의 내면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걸어야 합니다. 걸으면 삶이 단순해지고 홀가분해집니다.현대인들은 정작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삽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물음에 무지합니다. 걸으면 그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평생 체육교사를 하던 한 선생님이 승용차를 몇 해 타더니 어느 날 나에게 고백했다.
"차를 탄 이후부터는 하체 힘이 없어지고 이상하게도 밤일조차도 힘이 들어요."
하지만 산길조차도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어지고 시멘트 포장길에는 개구리, 뱀들이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시신이나 자국들로 얼룩져 있다. 더 웃기는 것은 그러면서도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연보호니 공해추방이니 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다니는 무리들이다.
얼마 전 금대계곡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독서삼매경에 빠졌는데, 시내버스가 내 앞에 슬그머니 멈췄다.
"감사합니다. 그냥 가시지 그랬어요.""만일 어르신이 스마트폰을 두들겼다면 그냥 갔을 겁니다. 책을 보시는 모습이 좋아 섰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