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대로 '전기 무상화 하자'고 할까봐 겁 난다."2011년 1월 27일 녹색성장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당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에너지 가격을 합리화하겠다는 보고를 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언론들은 복지 논쟁에 뼈 있는 '농담'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은 전기 요금 인상에 대한 강변이었다. 이후 값싼 요금 때문에 전기 펑펑 쓴다는 기사들이 꼬리를 물었고, 결국 한국전력은 지난해 8월(4.9%)과 12월(4.5%) 두 차례 인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력은 지난 10일 또다시 연료비 연동제를 포함해 16.8%의 요금 인상안을 담은 '전기공급약관 개정 신청서'를 지식경제부 전기위원회에 제출했다. 산업용은 평균 12.6%로 가장 높았고, 일반용은 10.3%, 농사용은 6.4%, 주택용은 6.2%, 교육용은 3.9%였다.
이에 정부는 두 자릿수 인상은 안 된다며 한 자릿수 요금 인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경제계에서는 "요금 인상은 물가 폭탄이 될 것이다. 올리려면 산업용 요금뿐만 아니라 주택용 등 모든 전기 요금을 인상하라"며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력과 정부·경제계 등의 치열한 논쟁에서 밀려난 건 국민이다.
한국전력의 요금 인상안 16.8% 제출... 중요한 게 빠져 6단계 가파른 누진제에 더운 여름 에어컨 한 번 제대로 못 켜는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대통령 말처럼 복지병에 기대어 값싼 전기를 펑펑 써대는 애물단지 취급받더니, 이젠 폭탄 같은 전기요금 인상 논의에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경제계는 물론 한국전력 이사회, 정부 부처 어디 한 곳도 국민의 처지를 대변하겠다는 입장은 없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형국이다.
한국전력은 누적적자를 이유로, 정부는 전력난 해결을 이유로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했을 때도 정부는 주택용 전력요금 인상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가중되는 경제난에 전기요금마저 인상된다면 가계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도 주택용 전기 요금 인상에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론을 경제단체들이 뒤집었다. 5월 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18개 단체는 산업용뿐만 아니라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요금도 현실화하라고 정부에 제안했다. 지식경제부 장관은 이틀 뒤인 5월 17일 "산업용을 올린다면 주택용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며 경제계 주장에 화답했다.
그런데 경제계·산업계가 내세운 주택용 전기도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어 보인다. 산업용 전기가 주택용 전기에 비해서 원가회수율이 높다는 주장은 주택용 전기에 부과되는 6단계 누진제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또 산업용이나 일반용 전기의 300kWh 이상 사용 계약자에게 부과되는 원가 이하의 경부하제 요금제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이런 여러 문제를 덮은 채 산업용을 올리려면 주택용도 올리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물귀신 작전이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주택용 전력의 누진제 현황을 조사했다.(위 표 참고) 그 결과 100kWh 이하를 사용하는 가구는 전체 가구 중 15.2%, 5단계 누진제를 적용받는 가구는 6.7%, 500kWh 초과하는 가구는 1.8%였다. 총 가구 중 29.6%가 201~300kWh 사용하는 3단계 누진제 대상이었다. 4단계 누진대상은 24.7%였다. 결국 전체 가구의 54.3%가 3, 4단계의 누진제를 적용받아 1단계보다 3배~4.5배 누진요금을 내는 셈이다.
1975년 12월, 소비자의 소득 수준에 맞게 전기 요금을 부과하고, 저소득층 보호와 에너지 절약을 유도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주택 전기요금 누진제. 그러나 가전, 전자 제품이 늘어나고 대형화를 되면서 소비전력을 늘어났음에도 이를 고려치 않고 100kWh부터 가파른 6단계 누진제를 적용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1975년 누진제 신설 당시 누진제 요금 차이(1단계 50kWh까지 kWh당 22원 12전. 4단계 500kWh까지 kWh당 49원 80전)는 2.2배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6단계 누진제로 인한 요금 차이가 사용요금 기준으로 11.7배에 달한다. 누진제 운영 목적이 전기사용료를 더 받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현실을 놓고 볼 때 누진제 자체를 폐기할 수 없다면 가장 많이 사용하는 201~300kWh(누진3단계)를 기본 사용전력으로 보고 현실에 맞게 누진제를 손질하는 게 현실적이다.
주택용도 올리라고? 전형적인 물귀신 작전
경제계·산업계에서는 산업용 전력 요금이 주택용 전력 요금에 비해 결코 저렴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전력의 통계자료만 보더라도 이런 주장의 근거는 없다.
대형 오피스텔, 대형마트 등 계약전력 300kW 이상 사용자에게 공급되는 일반용 '을', 광업이나 제조업 등 계약전력 300kW이상 사용자에게 산업용 '을' 요금이 적용된다. 이 사용자에게는 계절별 차등요금제와 시간대별 차등요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전기 사용 절약을 유도하고 전기 사용이 많은 여름철과 주간 시간대에 높은 요금을 부과하고 있다지만, 실상은 대형 자본에게 값싼 전기요금을 혜택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정보공개를 통해 확인한 2012년 5월 일반용 '을'이나, 산업용 '을' 전력의 사용실태는 보면 가장 요금이 저렴한 경부하 시간대(23:00∼09:00) 전력 사용량이 일반용 '을'의 경우 41.2%, 산업용 '을'의 경우 52.2%에 달한다.
이 시간대 사용요금은 일반용 '을'은 kWh 당 52.6원, 산업용 '을'은 kWh 당 52.3원에 불과하다. 주택용 저압 100kWh 이하 사용자에게 적용되는 57.3원보다도 싼 요금이며, 누진제도 적용받지 않는다. 또 최대부하 시간대 요금과 비교해도 가격이 1/3에도 미치지 못한다. 가장 비싼 최대부하 요금도 일반용 '을'은 172.9원, 산업용 '을'은 167.9원으로 주택용 3단계 누진제 금액보다 저렴하다.
우리나라 전체 전력 사용량 중 산업용 전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55%를 상회한다. 또 오피스텔이나 대형마트 등에 공급되는 일반용 전력도 20%를 오르내린다. 전체 전력의 75% 정도가 산업용이나 일반용 전력이며,
이 가운데서도 300kWh 이상 계약자에게 적용되는 일반용 '을', 산업용 '을' 사용자는 가장 많은 전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절반 정도는 경부하제 요금 때문에 주택전력의 최저 요금보다 싸다.
이런 엄연한 현실을 두고 산업용을 올리려면 주택용도 올리라는 주장은 억지이자 물귀신 작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또 산업용 전력 인상 반대 논리로 주장되어지는 것 중 하나는, 산업용 전기요금이 오르면 고스란히 물가 인상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 YMCA 발표에 따르면 일반 제조업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원가요인은 1% 정도에 불과하며, 철강산업 등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업종도 원가요인은 3% 정도라고 한다.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이 물가폭탄이 된다는 주장은, 물가인상을 앞세워 전기요금 인상을 막아 보자는 얄팍한 수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볼모로 한 전기요금 인상 논의 중단해야
아직 전기요금 인상 논의가 어느 쪽으로 결론날지 가늠하기 힘들다. 한국전력과 정부, 경제계가 각각 제 목소리를 굽히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정작 물가고와 경제난에 허덕이는 국민을 위한 목소리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가정에는 에어컨 몇 번 켜도 누진제로 요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를 두고 "(국민들이) 전기 무상화 하자고 할까봐 겁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전기요금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얼마나 안일한가를 보여준다.
국민 의견 수렴 없이 파워 집단의 힘 겨루기식으로 진행되는 전기요금 인상 논의는 우려스럽다. 만성적인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자릿수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한국전력. 전력대란을 막으려면 두 자릿수는 아니더라도 주택용 전기 요금도 올릴 수밖에 없다는 정부. "왜 산업용만 인상하느냐, 주택용도 올리라"는 경제 단체. 고래 싸움에 구경꾼이 된 국민들은 불안하고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