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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팔티 차림에 검은색 야구 모자를 쓴 약간 이국적인 인상, 은은한 조명아래 고풍스런 분위기가 배어 있는 음악홀 뮤직 박스에서 바리톤 음성의 DJ가 멘트를 날린다. 

"지금 창밖엔 비가 내립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가 비 오듯 그립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그대 얼굴입니다. 한 방울의 비가 황홀하게 들려오는 그대 노래입니다. 조용필의 '내 가슴에 내리는 비'입니다."

13일 저녁 10시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 테이블엔 수십 명의 손님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DJ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낡은 LP레코드판 튀는 소리까지 영락없는 7~80년대 음악다방의 풍경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과거'는 '현실'이 된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 이 카페에선 의사 손태선씨가 오후 7~ 새벽 2시까지 DJ 일을 한다.
▲ 닥터 손태선 씨가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 시애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 이 카페에선 의사 손태선씨가 오후 7~ 새벽 2시까지 DJ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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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뮤직 박스엔 이젠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해진 '음악카페DJ' 한 사람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명DJ'라 불리는 손태선(54)씨가 그 주인공.

손씨의 직업은 놀랍게도 내과 의사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전주시 삼천동 동신아파트 입구에 있는 양지내과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한다. 어둠이 밀려오는 오후 7시면 손씨는 어김없이 자신이 운영하는 라이브카페 '시애틀'로 출근한다. 낮엔 가운을 입고 환자의 몸을 치료하고 밤엔 청바지와 반팔차림으로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정신을 치료하고 달래준다.

낮엔 의사로, 밤엔 명DJ로 일하는 손태선 씨가 선곡한 LP판을 축음기에 올려놓고 이어폰을 귀에 대고 음향을 조정하고 있다. 그의 등뒤로 수만장의 LP판이 빼곡하다.
▲ 닥터 DJ 손태선 씨 낮엔 의사로, 밤엔 명DJ로 일하는 손태선 씨가 선곡한 LP판을 축음기에 올려놓고 이어폰을 귀에 대고 음향을 조정하고 있다. 그의 등뒤로 수만장의 LP판이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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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소리를 아름다운 형식으로 조화시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는 시간적 예술입니다. 음악은 영혼의 가장 비밀스럽고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예술입니다."

손씨의 고향은 광주다. 전주가 좋아서 전주로 온지 20년째. 그가 DJ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6년 고3때부터다. 그는 중·고교 시절 통기타 가수들이 나오는 심야 음악프로그램에 심취돼 밤낮으로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대학입시 후 광주시내 음악다방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DJ 도우미를 자청했다. 그러다 1년 만에 진짜 DJ가 됐다. 조선대 의대에 진학한 손씨는 어려운 의학공부를 하면서도 음악다방의 '판'(레코드)을 놓지 않았다. DJ일을 약 15년 정도 하다가 중간에 잠시 쉬었다 다시 하게 된 그는 DJ경력 20년의 베테랑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 전시된 1970년대의 영사기. 필름이 끊어졌지만 다시 이어서 영사기를 봤던 추억이 서린 영사기다.
▲ 1970년대의 영사기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 전시된 1970년대의 영사기. 필름이 끊어졌지만 다시 이어서 영사기를 봤던 추억이 서린 영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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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가 처음 카페를 개업하려 할 때 가족들이 극구 반대했다. 동료 의사들도 미쳤다고 했다. 얼마 못갈 것이라고 악담들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열성 팬이 됐다. 시애틀의 주손님의 연령층은 30~40대. 때론 의사도 오고, 손씨의 환자들도 온다. 환자를 진료할 때 환자가 알아보고 DJ얘기를 꺼내면 진료 중에도 화제는 금세 음악으로 바뀐다. 그만큼 그는 음악에 미친 사람이다.

"남에게 음악의 세상을 알려주려고 한 거지 돈을 벌려고 카페를 하는 건 아닙니다. 종업원들 월급 주고 가게세 주면 수입금은 없어요. 그냥 현상유지에요."

이곳에 오면 젊고 예쁜 여가수가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밤 8시부터 40분까진 강유진씨가 라이브를 선보이고, 10시부터 40분까진 김민영씨가 무대앞에 앉아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매일 오후8시부터 8시 40분까지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강유진 씨. 강씨가 통기타를 치며 '당신은 모르실거야' 를 열창하고 있는 모습.
▲ 통기타 가수 강유진 씨 매일 오후8시부터 8시 40분까지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강유진 씨. 강씨가 통기타를 치며 '당신은 모르실거야' 를 열창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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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의 카페는 알라로그 음악만 취급한다. 그는 1976년부터 현재까지 LP2만장, SP3천장, CD5천장 등 약 3만장의 판을 보유하고 있다. 판값만 자그마치 15억이다.

그의 멘트와 LP판 음악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심지어 서울과 대전에서 전세버스를 대절하여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최고의 카페라고 자부한다.

"좋은 음식점에 가면 좋은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처럼 좋은 카페엔 좋은 음악이 있습니다. 고로 좋은 음악을 들으면 손님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매일 오후10시부터 10시 40분까지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김민영씨. 김씨가 통기타를 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열창하고 있다.
▲ 통기타 가수 김민영씨 매일 오후10시부터 10시 40분까지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김민영씨. 김씨가 통기타를 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열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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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인후동에 사는 이종철(51)씨는 이 카페 단골이다. 3년 전 친구들과 우연히 들르게 된 게 인연이 됐다.
 
"이곳에 오면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판이 다 준비돼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시대라 모바일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 게 편리하긴 하지만 그 속엔 LP가 주는 행복감이 없어요. LP로 팝송을 듣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 때론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곳에 와 음악을 들으면 지난 시절이 농축돼 흘러가는 걸 느껴요."

또 이날 시애틀에 처음 왔다고 말하는 전주시 삼천동의 진홍권(49)씨는 뮤직 박스 안의 DJ가 의사라는 말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카페 분위기가 아늑하고 조금은 고풍스런 느낌을 준다."며 "음악 속에 빠져 술 하잔 마시고 싶을 때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항상 좋은 음악을 선곡해서 손님들에게 선물하는 게 DJ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손씨. 손님들이 음악을 선곡하면 제목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단다. 그만큼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 가면 각종 양주병이 구석구석에 전시돼 있다. 이곳은 닥터 손태선 씨가 바리톤 음성으로 멘트를 날리며 DJ를 보고 있다.
▲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 전시된 각종 양주병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소재 라이브 카페 시애틀에 가면 각종 양주병이 구석구석에 전시돼 있다. 이곳은 닥터 손태선 씨가 바리톤 음성으로 멘트를 날리며 DJ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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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도 손님들에게 행복과 평온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왜곡되지 않고 장식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 손씨와 인터뷰 하는 동안 손님은 어느새 꽉 차게 테이블을 점령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 대폭 축소되어 실렸습니다.



태그:#낮엔 의사로, 밤엔 DJ, #이 시대의 명DJ, #전주 삼천동 라이브 카페 시애틀, #응악에 미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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