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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일 이주여성 추모제에 전시된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이주여성 7명의 영정
 2011년 6월 2일 이주여성 추모제에 전시된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이주여성 7명의 영정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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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과 4일, 두 명의 이주여성이 세상을 등졌다. 재중동포인 이아무개(60, 서울 강동구)씨, 그리고 김아무개(32, 강원 철원군)씨. 결혼과 동시에 한국에 들어온 두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기대했을 테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폭력이었다. 2일 저녁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이씨는 병원 이송 후 숨졌다. 지난달 30일 남편에게 맞아 위급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진 김씨는 뇌사상태로 4일을 버티다 4일 오전 사망했다.

2007년 베트남 이주여성 후안마이씨가 결혼 한 달 만에 남편에게 살해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혼이주여성의 가정폭력 피해가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

여성가족부 산하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의 연도별 상담실적을 살펴보면 2007년 1674건이었던 가정폭력 피해 상담은 2008년 2351건, 2009년 4205건, 2010년 4672건, 2011년 5744건으로 최근 몇 년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 건수뿐 아니라 내용도 문제다. 2010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결혼이주여성은 일반가구 여성보다 심한 신체적 폭력을 당하는 비율이 1.6%포인트 더 높았다. 배우자로부터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재산을 임의로 처분당하는 등 경제적 폭력 피해율도 15.3%에 달했다. 일반가구 여성(7.6%)의 두 배 가량인 수치다.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은 한국말이 서툴다. 남편과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10세 이상 나이차가 있는 상황도 많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결혼한 다문화가정에서 남편 연령이 10세 이상 높은 경우는 50.9%를 차지했다. 반면 여성이 연상인 부부는 전체 11.2%뿐이었다.

결혼이주여성 가정폭력 피해 상담, 해마다 증가... 5년 새 3배↑

허오영숙 사단법인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아래 인권센터) 조직팀장은 "언어·문화·나이에서 오는 세대차 등으로 국제결혼 부부가 (한국인 부부보다) 갈등의 여지가 많은 건 사실"이라며 "특히 언어가 안 통해 오해가 계속 쌓이고, 그게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다른 원인은 '체류 문제'다. 한국에 온 결혼이주여성은 맨 처음 1년 체류 비자를 받는다. 이를 연장하며 2년 이상 합법적으로 국내에 있었고, 관련 서류 심사 결과 승인을 받으면 영주권이나 국적 취득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껏 이 과정에는 반드시 남편의 신원보증이 필요했다. 폭력을 가하거나 생계를 꾸리는 데 무관심한 남편들에겐 '신원보증'이 일종의 무기였다.

2일 사망한 이씨 역시 남편 홍아무개씨로부터 '중국으로 추방시키겠다'며 협박받고, 간이귀화서류를 폐기당하는 등 국적 취득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직업이 없는 홍씨는 이씨가 식당일을 하고 벌어오는 돈에 의존했다. 그러면서도 이씨의 코뼈를 부러뜨리거나 그에게 끓인 라면 냄비를 던져 화상을 입히는 등 결혼생활 7년 동안 계속 폭력을 행사했다. 이씨는 끝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같은 사실이 논란이 되자 5일 법무부는 "결혼이민자가 귀화허가를 신청하는 경우, 한국인 배우자가 반대하더라도 귀화허가 신청이 가능하며 한국인 배우자의 신원보증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해명자료를 냈다.

바로 전날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법무부가 2011년 12월 23일 출입국 관리법 시행규칙에 기재되어 있는 신원보증서 제출 규정을 삭제했다고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인권위가 법무부에 '해당 규정은 개인의 존엄성과 양성평등에 기초한 혼입의 성립과 가족생활 유지라는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삭제를 권고한 데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허 조직팀장은 "지난 6월 인권센터에서 국적 취득절차를 도운 여성도 남편의 신원 보증서를 냈다"며 "이주여성들을 돕는 현장에서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고 되물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법무부와 인권위가 서둘러 사태수습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경찰, 가정폭력을 집안일로 인식" - "문제 해결할 시스템 갖췄나"

7월 12일 '여성폭력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동행동'이 개최한 긴급토론회
 7월 12일 '여성폭력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공동행동'이 개최한 긴급토론회
ⓒ 여성폭력 추방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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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한국사회에선 '가정폭력 = 부부싸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경찰의 대응이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12일 인권위 배움터에서 열린 '반복되는 경찰의 가정폭력 범죄 미흡 대처, 이대로 안된다' 토론회에서 고미경 한국여성의 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은 "피해사례들을 보면 절반 이상의 경찰이 가정폭력을 '집안일' 혹은 '사적인 일'로 인식한다"며 "경찰의 무대응, 무인식, 무성의, 무조치는 가해자가 '별 것 아니다'란 인식을 갖고 더 자신감에 차 폭력을 행사하게 한다"고 말했다.

숨진 이씨도 사건 발생 직전 경찰에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12일 <한겨레>에 따르면, 당시 출동한 강동경찰서 성내지구대 경찰은 이씨를 지구대에서 보호하다가 집안에 남편 홍씨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를 데려다 줬다. 같은 시각, 남편은 성내지구대에 찾아와 아내의 행방을 물었고, 이씨가 집에 돌아온 사실을 확인했다. 20여 분 뒤 홍씨는 흉기로 이씨를 살해했다.

권김현영 이화여대 여성학 강사는 "최근 가정폭력 사건들을 보면 경찰이 피해자 거주지를 알려주는 등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않았고, 공권력 기능도 안 하고 있다"며 "경찰이 가정폭력을 신고한 피해자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가정폭력은 범죄이므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다' 등을 알려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과연 갖춰져 있냐"고 비판했다.

이주·여성관련 단체들은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이주여성들을 추모하는 집회 '이주여성들이 죽지 않을 권리'를 오는 18일 낮 12시 서울시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고, 이후 전국 규모의 캠페인을 진행할 계획이다.


태그:#이주여성, #가정폭력,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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