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벽 5시 30분, 안개가 마을 허리 틈마다 자욱하게 배어있는 시간. 예초기를 들고 포도밭으로 향한다. 간단히 몸을 푼 후 한참동안 풀을 베고 돌아오니, 어느덧 해는 중천으로 떠오르면서 대지를 뜨겁게 달굴 채비를 하고 있다.

이미 온도는 30도를 향해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농촌의 하루는 새벽일로 시작되고 해질녘 일로 마무리된다. 오전과 오후는 아주 시급한 일 아니면 사실상 휴식이다. 하늘이 농부에게 준 선물인 셈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작렬하는 무더위와 맞서야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회색하늘, 우중충한 구름, 쏟아지던 비로 축축한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 하루의 태양 아래 대지는 다시 폭염 속에 허덕거린다. 개들은 혀를 내밀며 헉헉거리고, 닭들은 흙을 파헤치며 몸을 식힌다. 만물이 허덕거리는데 영장류인 사람이라고 별 수 있으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더위에 여름철 보양식 홍보가 한창이다. 삼계탕, 장어구이, 추어탕, 콩국수, 민어, 전복죽 등등 다양한 음식들이 매체를 타고 소비자들의 입맛을 돌게 한다. 지역별로 다양한 여름나기 음식을 알리며 지자체 홍보를 곁들이고 있다.

아내가 차려준 호박잎에 된장찌개
▲ 여름철 보양식 아내가 차려준 호박잎에 된장찌개
ⓒ 이종락

관련사진보기


오랜 세월 도시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귀농 초 주민들이 내놓는 음식이 맞질 않아 난처한 경우도 있었다. 부모님이 경상도 출신이라 이곳(나는 경북 상주로 귀농했다) 음식에 대해 어느 정도 느낌이 있지만, 솔직히 말해 맛있다는 느낌과 좀 거리가 멀었다. 

경상도 음식은 투박하고 단순하다. 맛도 맵거나 아니면 무미하다. 뚝딱 해치운다는 표현이 '딱'이다. 입맛 없을 땐 물에 말아 먹거나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다 털어 놓고 쓱쓱 비빔밥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름철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도 그들의 식단은 주로 밥과 된장, 고추, 호박잎, 상추 정도다. 말이 좋아 된장에 풋고추 푹 찍어 밥 한 그릇 먹어 치운다고 하지만 실제 그런 밥상을 앞에 놓으면 먹어도 허기가 질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렇게 먹고 어떻게 힘든 농사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지만 한 5년 살다 보니, 나 역시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여름철엔 더위로 인한 무기력으로 입맛도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노동 강도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 호박잎 쌈은 입맛을 돌려주기도 한다. 섬유질과 비타민 C, 항산화 작용과 항암 효과에 다이어트 효과도 뛰어난 호박잎은 여름철 보양식이라 해도 무방하다.

호박잎에 부족한 단백질은 된장으로 보충하는데 된장은 알다시피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따듯한 밥 한술에 호박잎을 된장에 푹 적시고,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 여름철 한 끼는 가뿐하다.

식후 텃밭에서 갓 따온 토마토로 입가심을 하면 최고의 웰빙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끔 삼계탕이나 다슬기 잡아 시원한 국 끓여 먹은 뒤 충분히 쉬는 것도 무척 좋다.

풋고추에 양념을 가미한 된장이 맛깔스러워 보인다.
▲ 보양식 풋고추에 양념을 가미한 된장이 맛깔스러워 보인다.
ⓒ 이종락

관련사진보기


귀농 전, 어느해 여름에 복잡한 일로 단 하루 동안 스트레스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한 결과 하룻밤 사이 2kg가 빠지는 사태(?)를 경험했다. 좋은 음식도 소용없었다. 정신적 건강이 몸의 건강을 지배한다는 단순 진리를 몸으로 겪은 뒤, 가능하면 편하게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가끔씩 '내가 살고 있는 경상북도 상주 역시 다른 지역처럼 특별하게 맛있는 음식이 있지 않을까?'하고 배부른 투정을 하다가 따끔한 소리가 속에서 들려옴을 느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름진 음식을 가까이 하면 사람이 비굴해진다."
"거칠고 조악한 음식일수록 먹으면 속이 편해진다."

살면 살수록 세상살이의 정곡을 찌르는 격언임을 깨닫는다.

서울서 찾아 온 지인들이 텃밭에서 상추, 쑥갓 등 채소를 캐고 있다.
▲ 집앞 텃밭 서울서 찾아 온 지인들이 텃밭에서 상추, 쑥갓 등 채소를 캐고 있다.
ⓒ 이종락

관련사진보기


내 손으로 키운 고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상추, 시금치, 아욱, 열무, 호박, 토마토, 가지 등을 바라보면서 '나처럼 이런 진짜 보양식을 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올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소박한 음식에, 적당한 휴식, 편안한 마음만 유지할 수 있다면 폭염도 비실비실 물러나리라. 그러면 조금씩 가을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태그:#보양식, #호박잎, #된장, #풋고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