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음속에 한 편의 시가 떠오르는 박노해의 버마 사진
 마음속에 한 편의 시가 떠오르는 박노해의 버마 사진
ⓒ 박노해

관련사진보기


글자가 없었다면 시인은 사진을 찍었을 거라고 한다. 많은 사진집 가운데 시인의 마음 같은 책을 발견했을 땐 짜릿하기까지 하다. 시를 쓰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왜 그런 기분이 들까?

그건 아마도 좋은 사진과 좋은 시는 새로운 풍경이나 삶의 모습을 보게 해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야, 시선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시인 박노해의 사진 전시회는 그래서 몹시 흥미롭다. 지난 14년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안데스 등지를 돌며 '지구마을 사진작가'가 된 박노해 시인이 기록해온 '빛으로 쓴 시' 한 편 한 편은 과연 어떤 느낌이 들는지...

이번 전시회 이름은 <노래하는 호수>, 더없이 서정적으로 느껴지는 전시명과 달리 그가 2011년 봄날에 찍은 사진들의 배경은 지난 시절 우리도 겪었던 혹독한 군사독재 아래 신음 중인 '버마'. 평화를 사랑하는 지극한 불심(佛心)의 나라에 세계 최장기 군사정권이 철권을 휘두르고 있는 모순된 현실에 가슴 아픈 곳. '아시아의 가장 아픈 땅'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나의 아시아는 주름이 깊은 땅, 펼치면 지구를 넘어설 만큼 광대한 땅. 그러나 아시아는 슬픔이 깊은 땅, 흐르면 지구가 잠길 만큼 눈물이 많은 땅." - 박노해 <노래하는 호수> 사진전 가운데

그래서인지 호수 위에 떠있는 꽃 농장에서 '꽃다운 노동'을 하고 전통문화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하기도 하고,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급자립의 삶을 이어가는 '버마' 인레 호수 사람들의 삶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버마? 미얀마가 아니던가요."

전시회 갤러리에서 관람객들에게 친절하게 사진 설명과 이야기를 전해주는 큐레이터에게 물어 보니, 미얀마는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 만든 국명이고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버마'란 이름이 진짜 나라 이름으로 남아 있단다.

버마의 심장 '인레 호수'와 고기잡이 어부
 버마의 심장 '인레 호수'와 고기잡이 어부
ⓒ 박노해

관련사진보기


인레 호수의 고기잡이는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되어 이뤄내는 부드럽고 치열한 떨림의 몸짓이다
바람과 물결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듯 천천히
한 발로 균형을 잡고 다른 발로 노를 저어가며
온몸으로 팽팽하게 그물을 끌어당긴다
대자연이 길러준 것을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깨끗한 노동은 깨끗한 밥이 되고 영혼이 된다
무릎 꿇어 은빛 물고기를 거두어 받는 시간,
햇살이 걸어오면 물결은 노래하고 노동은 춤을 춘다

- 박노해 사진전 <노래하는 호수> 가운데

박노해의 발걸음이 머문 곳은 '버마의 심장'이라 불리는 인레(Inle) 호수로, 그가 찍은 사진들 속에는 호수에 삶을 의지해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들이 주로 나온다. 전통방식으로 깨끗한 '밥'을 길어 올리는 인레 어부들과 물 위에 떠 있는 위대한 농장 '쭌묘'에서 토종씨앗을 지켜가는 농부들, 호수족과 고산족이 마을 장터에 모여 서로 섞이고 나누며 풍성해지는 삶까지...

수고로이 하루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고, 저마다의 고유한 삶이 어우러져 흘러간다. 사진 하나 하나에 지긋이 눈길을 머물다 보면 마치 작은 조각배를 타고 강물 따라 바람 따라 나도 흘러가는 것 같다.

글은 있는 둥 마는 둥 사진만 가득한 사진전은 일반적인 관람객들과 소통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전직 시인'답게 사진에 담긴 그의 진솔하고도 생생한 글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 좋다.

내 맘을 흔드는 그런 사진을 마주쳤을 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찍는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찍었을까? 등등 궁금한 마음을 사진 옆 그의 글이 해소해 준다. 하지만 사진들 속에서 분명히 느낀 건 박노해 시인은 이제 글이 아닌 사진으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 그 때문일까, 그의 사진 속에 푹 빠지다 보니 문득 한 편의 시가 내 마음속에 떠오른다.

다른 갤러리와 달리 전시 시간이 저녁 10시까지라 사진 관람이 여유롭다. 더운 여름밤, 북악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노을 지는 부암동 골목길을 걸으며 갤러리를 찾아가는 느린 시간이 운치 있고 설레고 즐겁다. 갤러리 내에 언덕 위 전망 좋은 카페가 같이 있어 약속장소로도 좋겠다.

호수위에 떠있는 광활한 농장 '쮼묘'
 호수위에 떠있는 광활한 농장 '쮼묘'
ⓒ 박노해

관련사진보기


"물 위에 떠있는 광활한 농장 쭌묘는 최고 품질의 채소를 길러내는 '버마 농산물 생산의 심장부'다. 이 쭌묘 농장에서도 심장부는 불전에 바치는 꽃밭이다. 버마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소득의 1/10을 바쳐 꽃을 사고 매일 아침 불전에 올리며 기도를 드린다. 덧없이 시들어버릴지라도 삶은, 밥보다 꽃이 먼저라는 듯이.

꽃을 길러 장터에 파는 마 모에 쉐(21)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쭌묘에서 꽃밭을 가꾸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은 제 손에 향기를 남기지요. 꽃을 든 사람들의 미소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처님께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될 거예요"- 꽃다운 노동, 박노해

ㅇ 전시기간 ; 10월 31일까지 (관람료 무료)
ㅇ 전시장소 ; 라 카페 갤러리 (www.racafe.kr)
ㅇ 관람시간 ; 오전 11시 ~ 오후 10시 (매주 목요일 휴관)
ㅇ 문의전화 ; 02-379-1975


태그:#박노해, #버마, #노래하는호수, #라카페갤러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