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요?
어린 시절 베트남 전쟁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굶주림을 벗어나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전쟁인 줄 알았습니다.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려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배웠습니다.
아저씨, 삼촌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조그만 점포를 열어 경제적으로 자립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아픔과 비극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우리나라가 가난을 벗어나는 기회를 얻은 전쟁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 보다 한참이 더 지난 후 베트남 전쟁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뜬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난 후입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부도덕하고 부끄러운 일인 줄 처음 깨달았지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하얀전쟁>의 기억도 남아있고, 지금도 전쟁의 육체적 후유증인 고엽제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참전용사들도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모두 제 3자들의 눈으로 바라 본 베트남 전쟁입니다. 직접 전쟁을 경험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듣게 된 것은 <전쟁의 슬픔>(바오 닌 저, 아시아 펴냄)을 통해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쟁의 슬픔>은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겨 낸 베트남 전쟁의 처절한 상처와 아픈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슬픔>을 쓴 작가 바오 닌은 베트남 전쟁의 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참전 군인입니다. 그는 열일곱 살에 인민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첫 전투에서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는 바람에 5개월 만에 하사로 진급하여 소대지휘관이 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작가 바오 닌이 기적 같은 생존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최전선에서 싸운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75년 4월 선 녓 국제공항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대원이 그를 포함하여 단 두 명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이후 전사자 유해발굴단에 참여하여 8개월간 베트남 전역에 버려진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한 후 전역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소설 <전쟁의 슬픔>에서 참혹한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낸 것은 모두 처절한 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까닭입니다.
베트남 전쟁, 정의만 승리하는 전쟁은 없다 작가는 전쟁이란 경험이 인생에서 접한 가장 커다란 비극이었다고 말합니다. 광기어린 살육 행위의 원인은 서로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었던 탓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나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던 이들이 본래는 서로를 존중하고 애정을 나누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존재들이건만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베트남, 한국, 미국의 수십만 젊은이들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흐르는 핏물로 강물을 만들었습니다." (본문 중에서)제 2차 세계 대전 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는 미군을 상대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빛나는 승리를 거둔 베트남 민족해방 전사에게 전쟁을 이렇게 표현하는 하는 것이 어색한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항미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인민군 출신 작가는 참혹한 죽음의 향연이 벌어지는 전쟁을 격고 난 뒤 깊은 후회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아무런 원한도 없이 서로 광기어린 살육을 벌인 전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아울러 <전쟁의 슬픔>은 야만적인 욕망과 잔인한 폭력의 베트남 전쟁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자네들도 사람을 깔아뭉개는 광경을 본 적이 있지? 그렇게 무거운 탱크도 말이야, 시체 더미 속의 뼈들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곤 했지. 탱크 안에 앉아서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그 약간의 흔들림을 더욱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어. 지금 땅이나 나뭇조각이나 벽돌 더미 위가 아니라 사람의 몸 위로 지나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어. 마치 물주머니 같은 사람을 가볍게 밟고 지나가면서 터뜨리는 느낌이지. 아이고 세상에." (본문 중에서)"정말 소름끼치는 것은 탄창의 총알을 절반이나 퍼부었는데도, 그녀가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는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려 했다는 것이다. 끼엔은 한 방이 아니라 탄창 속에 남아 있는 나머지 절반의 총을을 다 쏘아 버렸다. 7.6미리미터 총알이 피로 붉게 물든 하얀 셔츠를 꿰뚫고 그녀의 등 아래 대리석 바닥에 퉁퉁 떨어졌다. 끼엔은 배를 움켜쥐고 네 구의 시체 옆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면서 헛구역질을 해 댔다." (본문 중에서)"끼엔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꾸앙의 배가 터져 창자가 다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것은 온 몸의 뼈가 거의 다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옆구리는 움푹 패어 있었으며, 두 팔은 늘어져 덜렁거리고 넓적다리는 시퍼랬다." (본문 중에서)바로 이런 표현들입니다. 전쟁의 슬픔은 구체적인 어떤 시점, 사건, 사람에 머무를 때 가슴을 찢는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가슴을 찢는 고통스런 기억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끼엔과 프엉, 어린 연인의 풋풋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전쟁의 슬픔>은 끼엔과 프엉이라는 열일곱 어린 연인의 풋풋하고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야기를 큰 줄기로 삼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끼엔은 한 평생보다 훨씬 긴 10년을 전쟁터에서 보냅니다. 끼엔과 그의 연인 프엉은 서로 상대방이 살아 있으리라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헤어졌기 때문에 전쟁이 계속되던 10년 동안 서로를 죽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린 시절을 보낸 하노이의 공동주택으로 돌아 온 끼엔과 프엉이 10년 만에 다시 만난 날 서로는 상대방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털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서로에게 귀신이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두 사람의 연인이 1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끼엔과 프엉처럼 풋풋한 사랑을 간직했던 수많은 청춘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끊어졌을테지요.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삶도 쉽게 행복해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처럼 살아나 다시 만난 연인들의 사랑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10년 동안 겪은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아픔, 슬픔, 처절한 경험들과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들 때문에 그냥 보듬고 감싸고 사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처럼 끼엔과 프엉도 끝내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소설은 곳곳에 생생하고 끔찍한 전쟁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끔찍한 죽음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끔직한 전쟁의 맨 얼굴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끝내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끼엔과 프엉의 사랑을 갈라놓았지만, 그 상처와 슬픔을 이겨내는 힘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전쟁에 대한 생생한 묘사만 담겨있었다면 이 소설이 얼마나 끔찍했을까요? 베트남 전쟁이 벌어진 밀림 속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 장면이 소설의 한 갈래였다면, 또 다른 한 갈래는 끼엔과 푸엉의 풋풋한 사랑이야기,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 그리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가 소설을 읽어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슬픔>은 베트남교육연구원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발행 연도에 관계없이 2011년 베트남에서 읽히고 있는 모든 책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가장 좋은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책을 직접 읽는 독자들은 베트남 최고의 문학작품이라는 찬사가 허명이 아님을 알 게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포스팅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