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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왕(742년~765년) 때의 스님 월명사는 피리를 매우 잘 불었다(善吹笛). 늘 사천왕사에 머물렀던 월명 스님(常居四天王寺), 빛이 고운 밤에 절 앞 큰길을 거닐며 피리를 불었다(嘗月夜吹過門前大路). 하늘을 떠가던 달이 스님의 아름다운 가락에 취해 길을 멈추었다(月馭爲之停輪).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삼국유사>는 그 이후 사람들이 사천왕사 앞길에 월명리(月明里)라는 이름을 붙였다(因名其路曰月明里)고 증언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인명기로왈월명리(因名其路曰月明里)' 바로 뒤에는 '사역이시저명(師亦以是著名)'이 이어진다. '월명사(師) 역(亦)시 이(是)로써(以) 이름(名)이 드러났다(著)'는 뜻이다.   

흔히 이 대목은 '월명 스님이 피리를 불어 달을 멈추게 한 일로 유명해졌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일 때문에 스님에게 월명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속뜻을 읽는다. 본래에도 어떤 법명이 있었겠지만, 민중은 달이 멈춘 '사건'에 심취하여 스님을 '월명사'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굳으면서 역사에 남았다고 보는 것이다.

사천왕사터 입구의 당간지주. 지주와 대숲 사이에 사천왕사터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보이고, 지주 오른쪽으로는 선덕여왕 가는 길이 보인다.
 사천왕사터 입구의 당간지주. 지주와 대숲 사이에 사천왕사터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보이고, 지주 오른쪽으로는 선덕여왕 가는 길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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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때도 죽은 때도 확인되지 않는 솔거(率居)의 이름도 그렇게 읽힌다. 꿈에 단군이 준 신필(神筆)을 받아 천재화가로 거듭났다는 솔거, 황룡사 벽에 소나무들을 그렸는데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졌다고 한다. 즉, 그의 이름 '솔거(率居)'의 '솔'은 소나무를 뜻하고, '거'는 새들이 그림의 가지에 앉아서 살려고(居) 한 데서 작명하였다는 해석이다.

자연의 섭리를 뛰어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에서도, 작명법이 일치되는 점에서도 월명사는 '음악의 솔거'였다. 스님의 음악을 들으려고 달이 걸음을 멈춘 것은, 황룡사 벽에 그려진 솔거의 소나무 그림을 보고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이야기와 어금버금한 난형난제 아닌가.

사적 8호인 사천왕사터가 폐허처럼 남아 있다.
 사적 8호인 사천왕사터가 폐허처럼 남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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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밤하늘의 달까지 멈추게 했던 월명사도 천상의 세계로 떠나가는 누이를 붙잡지는 못했다. 그는 다만 노래(歌)를 남겨 누이(妹)의 죽음(亡)을 애도하면서(祭)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충담사의 <찬기파랑가>와 더불어 향가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제망매가>를 읽어본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같이
한 가지에서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본래 인간 세상에는 '삶과 죽음의 길'이, 지금 이 시각이기도 하고 현재 이곳이기도 한 '여기'에 함께 있다. 살아있는 이도 언젠가는 죽고, 그것도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고, 내 옆의 사람도 그렇다. 모두가 불안감에 싸여 '머뭇거리며' 살아간다.  

게다가 누이는 갑자기 죽었다. '이른 바람에'는 누이가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삼국유사도 월명사가 '일찍이'(嘗) '누이를 위해 제사 지내고 노래를 지었다'(爲亡妹營齋作鄕歌)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천명을 누리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누이였으니 '나는 간다'는 말도 남기지 못했다. 당연히 월명사는 더욱 슬펐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월명사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누이가 먼저 죽어 떠나가는데도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피리를 불어 달까지 멈추게 하는 월명사였지만, '아아' 탄식을 내뱉는 도리뿐이었다. 월명사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천왕사의 목탑 기둥 주변에 배치되었던 사천왕상 전돌 조각. 당대 최고의 조각가 양지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경주박물관 소장.
 사천왕사의 목탑 기둥 주변에 배치되었던 사천왕상 전돌 조각. 당대 최고의 조각가 양지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경주박물관 소장.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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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사가 사천왕사에서 피리를 불어 달을 멈추게 한 밤은 누이가 죽은 때보다 훨씬 뒤였다. 피리소리를 듣고 가던 길을 멈춘 달은, 인간이 남긴 과학적 글에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분명히 어린 나이에 죽은 그의 누이였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도 '월명사 도솔가' 이야기 끝에 자작시 한 편을 붙여 두었다. '(전략) 피리소리가 달을 움직여 항아(姮娥)를 머무르게 하였구나.(후략)' 항아는 선녀의 다른 이름이지만, 일연의 시는 과학적 글이 아니라 문학적 글이므로 그렇게 피상적으로 읽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일연은 탄식은 잘 새겨들어야 한다.

'피리소리를 듣고 멈춰선 달은 월명사의 어린 누이였도다!' 

월명사의 사천왕사터, 선덕여왕릉 입구에 있다

월명사가 머물러 살던 중 피리를 불었던 사천왕사는 문무왕 11년(671)에 짓기 시작하여 문무왕 129년(679)에 완공되었다. 그러므로 사천왕사는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를 몰아내려고 했던 신라인들의 불교적 염원이 깃든 절이었다.

선덕여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사천왕사터는 사적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사찰 건물 등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목이 잘려나가고 없는 귀부 둘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탑 기둥 주변에 배치되었던 사천왕상 전돌 조각이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제망매가, #사천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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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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