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우리나라는 곳곳에 유물이 산재해 있다. 사람들과 차량의 왕래가 잦은 도시는 물론이고,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의 어느 한적한 길가에도 유물 한두 점이 외롭게 서 있는 것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너무 흔해서 귀하게 여기고 소중히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문제다. 밭 한가운데 어린아이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철제 울타리를 둘러쳐 놓은 게 전부인 탑들이 그 자리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을지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탑들을 모두 박물관 안으로 옮겨 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유 교수의 말은 우리 국토 안에 존재하는 유물과 유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를 말해준다. 박물관 안에 전시돼 있는 유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듯이, 국토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땅 어느 곳에 존재하는 유물이든 함부로 대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다.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유물들, 오랜 풍상에 표면이 서서히 바스러지고 있는 게 눈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그 유물들은 사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더 자연스럽다. 그 유물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생생하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유 교수가 말한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표현은 '전 국토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보물창고'다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한국전쟁을 치르고도 이 정도인데, 만약에 과거에 그런 불행한 역사를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마구잡이로 도굴하고 강탈해간 우리 유물이 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본이 자기네 국보로 간직하고 있는 유물의 상당수가 그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들이다. 만약에 그 유물들이 지금까지 우리 땅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아마 우리나라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은 또 '전 국토가 보물창고'라는 말로 바꿔 부를 수도 있다. 박물관에 있는 유물치고 '보물' 아닌 것이 없다. 거의 대부분 '국보' 아니면 '보물'이다. 전 국토가 박물관인 우리나라는 또 그런 국보와 보물이 너무 많아서 무엇이 '진짜 보물'인지를 모르고 지나칠 때도 있다.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져 있는 보물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이름이 붙은 박물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역시 마찬가지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모두 다 빛을 보고 있는 건 아니다. 때때로 '유홍준'이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그 흔한 보물에 관심을 가지려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전 국토가 보물창고인 우리나라는 어딜 가든 보물 한두 점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 보물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그동안 무심히 보아 넘겼던 마을의 유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 별 관심이 없었던 '동네 박물관'을 찾아가 보는 것이다.
전 국토가 박물관인 나라답게 우리나라는 웬만한 지역에 박물관이 하나씩은 들어서 있다. 춘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 중앙에 상당히 큰 규모의 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름은 '국립춘천박물관'이다. 강원도에서 발굴하거나 기증 받은 유물 2만 3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박물관 역시 '동네 박물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박물관이지만, '국립'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평소 이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다. 당연히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그래서 동네 사랑방 구실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박물관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박물관 탓이 아니다. 동네에 있는 박물관을 단순히 '동네 박물관'으로 치부하고, 그 무엇 하나 자세히 살펴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다.
국립춘천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보물들
국립춘천박물관 역시 소중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이 보물들 중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들도 있다. 이 보물들은 이곳을 찾아오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유물들의 구성은 다른 박물관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는 그 앞에만 서면 좀처럼 다른 유물로 발을 옮겨 딛기 힘든 두 가지 보물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한송사 터 보살상(석조보살좌상)'이다. 이 보살상은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유리알처럼 밝은 빛을 띠고 있어 좀처럼 시선을 떼기 힘들다. 부처상과 보살상을 막론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조각상도 드물다. 표면에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지 않았다면 더욱 더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보살상은 어린아이 모양으로 크기가 아담해서 더 정이 간다.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누군가에겐 그 이마에 박힌 보석이 매우 값진 물건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보살상은 정작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는 표정이다. 볼과 턱이 도톰한 게 매우 후덕한 인상이다. 명상에 잠긴 듯 지그시 감고 있는 눈이 그 눈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 없이 편안하게 만든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인데도 전체적인 윤곽선이 하늘거리는 비단만큼이나 부드러워 보인다. 머리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는 게 또 다른 특징이다. 이 보살상은 국보 제124호다. 고려 전기의 보살상으로 강릉의 한송사 터에서 발견됐다. 이 보살상은 1912년 일본에 밀반출되었던 것을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되찾아왔다.
산수가 아름다운 강원도에서 이런 유물을 접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기 힘들다. 이 역시 춘천을 여행하는 또 다른 묘미가 될 수 있다.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보물은 '창녕사터 나한상'이다. 이 33인의 나한상들은 수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실적이다. 이 나한상들은 나한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도, 지극히 세속적이다. 인간적인 면이 강하다.
'나한'은 '최고 깨달음을 얻어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는 임무를 지닌 불교 성자'를 이른다. 그런데 이들 나한상에서는 그런 종교적인 색채를 발견하기 어렵다. 나한상이라기보다는 그냥 '강원도 어느 마을에 사는 한 동네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나한상들은 모두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심지어 한 나한상은 바위 뒤에 숨어 얼굴만 살짝 내민 채 무언가를 훔쳐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할머니 형상을 한, 한 나한상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다. 그 주름이 인간사의 고단함을 말해준다.
이 나한상들을 조각한 인물은 종교보다는 인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가 살아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을 다루는 조각가로서는 천재였던 것이 분명하다. 차가운 돌조각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나한상들은 무엇보다 전체가 한 가족인 듯 친밀한 모습을 하고 있어 더 정겹다.
이 나한상들은 영월 창녕사지 오백나한전 건물터에서 발굴됐다. 만들어진 연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이 나한상들은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하고 보물들 중에 보물이다. 이런 보물을 곁에 두고서 멀리 다른 보물을 찾아나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국립춘천박물관은 이 나한상을 전시하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 춘천을 여행하면서 국립춘천박물관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내 집 앞, 작은 공원과도 같은 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은 주택가에 접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문턱이 매우 낮다. 편할 때 아무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다. 박물관 시설 중 일부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실이나, 놀이터로 사용된다. '어린이 문화 사랑방'은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직접 만들어보는 '문화재 놀이터'다.
국립춘천박물관은 유물 전시 외 시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때마다 다양한 주제를 가진 전시회가 열린다. 지금은 '국립춘천박물관, 10년의 발걸음'이라는 주제로, 2002년 개관 이래 지금까지 박물관이 걸어온 '길'을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회는 강원도에 왜 국립춘천박물관이 존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립춘천박물관은 2003년 '올해의 우수건축상'을 수상한 건물이다.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박물관 뒤 야트막한 산 위로 나 있는 구불구불한 산책로도 자못 예술적이다. 짧지만 아름답다. 이 산책로 역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못지않은 보물이다.
박물관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애막골새벽시장'이 열린다. 전통시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들러봐야 할 시장이다. 이 시장은 근처 아파트에서 새벽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시장은 산책을 마친 뒤 아침 찬거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주민들로 북적인다.
이 시장에서는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비롯해, 소소한 일상용품들이 팔린다. 심지어 집에서 쓰던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도 있다. 이 시장은 무엇보다 상인 같지 않은 상인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국립춘천박물관의 나한상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