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력직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가 마련한 '지방자치제제 개편안'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행정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시대역행적 개악안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와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는 23일 오후 대전시의회 대회의실에서 '대통령직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안에 대한 대전시민토론회'를 개최했다.
지난 6월 대통령직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가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지방자치체제 개편 기본계획'은 대도시의 74개 자치구·군의회를 전면 폐지하고 광역시의 구청장·군수 직선제를 임명제로 전환하며 16개 지역 36개 시·군·자치구를 합병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한 목소리로 이번 개편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날 '지방행정체제 개편안의 문제점'이라는 주제로 첫 번째 발제에 나선 대전대 행정학과 곽현근 교수는 "이번 개편안은 한국 지방자치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는 ▲ 자치구 간 행정서비스와 복지수준의 불균형 시정 ▲ 생활권과 행정권의 괴리 ▲ 시-자치구 간 갈등으로 인한 사업지연 ▲ 대도시 종합행정의 요구 등에 부응하기 위해 자치구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이런 문제는 자치구 폐지가 아니라 ▲ 시-자치구 간 권한과 재정 조정 ▲ 자치구 간의 경계조정 ▲ 합리적 갈등관리 등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다수 지방자치 전문가들은 자치구 폐지가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행정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시대역행적 개악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곽 교수는 또 "자치구 폐지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보를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자치구 폐지는 민주화운동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쟁취한 대의민주주의를 파괴한다"며 "자치구 폐지로 인한 직선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수의 감소가 초래할 대의민주주의의 결손은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번 개편안이 법제화될 경우 지방의원 수만 960명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어 곽 교수는 "대도시 자치구·군 폐지는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지금도 기초지방자치단체의 평균인구가 22만 명에 이르러 주민참여 활성화에 애로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대도시 자치구·군을 폐지하는 것은 풀뿌리 주민자치를 구현할 기초자치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자치구 폐지는 오히려 행정효율성마저도 떨어뜨릴 것이라는 게 곽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Katsuyama(2003)와 Dollery & Crase(2004: 22) 등의 연구결과를 예로 들면서 "합병론자들이 신봉하는 규모경제 원리의 타당성은 특히 노동집약적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며 "교육·소방·경찰·문화·사회복지서비스 등 노동집약적 지방공공서비스는 규모가 커질수록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오스트롬의 '다중심거버넌스 체제'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며 "하나의 광역정부로 이루어진 일사불란한 단일중심체제보다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효율성 측면에서도 다중심거버넌스체제가 우월하다"며 "그 이유는 다중심거버넌스체제의 민주적 효율성 매커니즘, 즉 경쟁, 발언권, 공공기업가정신, 민관공동생산, 가외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또 "자치구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단층자치제를 채택한 제주도 사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며 "제주도는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4개 시·군 자치제를 폐지하고 2개 행정시로 전환한 후 제주시지역으로의 집중과 서귀포·남제주군,북제주군의 발전활력 저하, 주민참여의 곤란 등으로 주민의 불만이 더 커졌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재 제주도는 기초자치의 부활을 전제로 지방자치체제 개편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끝으로 일본 도쿄와 영국 런던, 미국 뉴욕과 LA 등을 사례로 들어 "대도시의 2자치 계층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하고 "특히 더욱 중요한 것은 대도시 자치구·군 폐지와 시·군·자치구의 합병과 같이 지방자치단체의 존폐와 정체성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는 결정은 반드시 해당 주민의 자기결정, 즉 주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초의회 폐지 논란과 문제점'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배재대 유진숙 교수는 우선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효율성만을 놓고 따져서는 안 된다, 단적으로 효율성만 따진다면 독재가 가장 효율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독재를 선택할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효율성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귀중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기초의회폐지 논란의 문제점으로 절차상의 문제를 들었다. 그는 "기초의회 폐지와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 전환은 근본적인 통치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이러한 사안은 최소 몇 년의 다차원적인 검토와 공적 영역에서의 토론을 거쳐 논의 및 결정되어야 한다"며 "그러나 이 개편안은 거의 공론화되지 않은 채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위원회 내부 논의조차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기초의회 폐지와 구청장 임명제 도입은 지방자치 차원에서의 입법부를 통한 행정부 통제·감시체제를 이중으로 약화시킬 것"이라면서 "뿐만 아니라 이번 개편안이 이렇게 민주적 의사결정의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강행되어야 할 타당하고 절박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에 나선 토론자들도 이번 개편안의 문제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가장 먼저 토론에 나선 황인호 대전동구의회 의원은 "이번 개편안은 민주화의 산물로 쟁취해 낸 지방자치를 훼손하는 짜맞추기 개편안"이라며 "행정체제 합병과 행정효율성과의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황경식 대전시의회 의원도 "현재의 기초구와 기초의회 등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발전적으로 개선해 나갈 일이지 일부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를 폐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면서 "지역의 실정과 역량에 맞게 구자치제의 선택을 주민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유묵 마창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전국의 지방의회와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행정체제 개편을 강행하고자 하는 이유는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결국, 광역시의 자치구 폐지라는 현재의 개편안이 그대로 진행되고 나면 나중에는 도 산하 시군의회 폐지와 시장군수 임명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금홍섭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도 "이번 개편안은 행정효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목적"이라면서 "이는 지방자치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종합토론을 통해 한 시민은 "기초구와 기초의회폐지를 찬성하는 패널이 없이 이번 토론회가 진행된 것에 대해 매우 아쉽다"며 "일반 시민들은 폐지 찬성 여론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러한 책임은 그 동안 기초구와 기초의회가 보여준 것이 부정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