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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5년 5월 19일 교통사고로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y)으로 인한 미만성 축삭손상(Diffused Axonal Injury)과 2, 6, 7번 경추골절을 입었다. 그 당시, 119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어 한 지역 국립대학 병원에 후송되어 80여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의식이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거기가 어디인지, 심지어 어머니조차 몰라 보는 참담한 지경이었다. 조금씩 내 상태를 파악해 나가면서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걷기는커녕 일어설 수도 없었고, 누운 자세에서 옆으로 돌아 누울 수도 없었으며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해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한 처참한 상태였다.

교통사고, 80일만의 의식 회복, 그리고 재활

난간을 움켜쥐고 최초로 내발로 선 모습 의식을 회복하자 경추 수술을 하고 난간을 잡았다. 사고 후 최초로 선 내 모습
▲ 난간을 움켜쥐고 최초로 내발로 선 모습 의식을 회복하자 경추 수술을 하고 난간을 잡았다. 사고 후 최초로 선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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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나의 재활기'로 처음 송고한 기사 제목이 '조용히 잠들어 버리지 왜 깨어 났을까?' 일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재활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세 번째로 옮긴 신촌세브란스에서 그때까지의 재활치료가 잘못 되었다는 진단을 받아 다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는 낭패를 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재활병원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재활치료에 임하자 나를 담당했던 치료사가 내가 걷는 자세를 관찰하더니 다른 치료사 (나중에 보니 그 치료사의 치료를 받기위해 지방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환자가 있을 정도로 그 치료사는 인기가 있는 분이었다)와 심각하게 상의했다. 다음날 '보행 분석기'란 장치를 이용해 나의 걷는 자세를 검사한 결과, 계속 이대로 걷게 되면 척추 측만증이 온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그후에 다시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재활을 받았으며, 최종 목표로 '하프 마라톤 완주'를 설정했다. 사고 후 1년여가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나만의 목표를 설정한 계기는 이렇다. 당시 신촌세브란스 재활병원 33병동 수간호사와 대화를 나누다가 건강했을 때 하프 마라톤 완주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젠 하프 마라톤은 영영 못하겠지요?"하고 무심결에 물었다.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그 분은 "왜, 못해요? 열심히 재활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라는 말로 대화를 끝낸 적이 있었다.

어느날 재활병원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데 '나의 등 뒤에서'란 복음성가를 하게 되었고, 내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 가사 중에 "너 일어나 걸어라~ 내가 네게 새 힘을 주리니"란 가사가 나오는데 당시의 내 처지에 딱 부합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뜨거운 가슴으로 "그래, 이제 사람에게서 내가 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 아버지를 내 재활의 주치의 삼고 열심히 재활에 임해 반드시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겠다"는 결심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내 마음에는 하프 마라톤 완주라는 구체적인 재활 목표가 생겼다. 곁에서 24시간 나를 간호하던 사랑하는 집사람도 잘 몰랐다. 나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서서히 목표 달성을 위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휠체어에 의지해 있던 당시로서는 전혀 불가능해 보였던 하프 마라톤 완주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었던 일은 주변에게 내 목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 입으로 목표를 이야기 하자, 내 결심은 점점 굳어져 가면서 스스로 희망을 가졌다. 그 희망을 부여잡고 하나하나 단계를 구분하여 중간 목표를 설정해 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내게 어엿한 '현실'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재활을 통한 철저한 관리... 세탁도 재활에 활용


처음 재활은 낯설기도 했지만, 그 효과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사례를 찾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한 적이 있다. 장애를 입고 재활치료를 받아보니, 운동이 장애를 치료하는 절대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나는 그 효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활에 관해 본격적으로 나서려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는 모르는 분야를 접하게 되면 일단 단어에 담긴 뜻부터 살피며 본질을 파악하려 애쓰는 버릇이 있다. 난 재활이란 말의 뜻부터 파악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 재활의 이해를 시작했다.

지금 재활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치료는 치료의 대상이면서도 주체가 되어 재활을 해야하는 환자를 배제한 과정이다. 병원 치료를 오래 받아본 필자가 보기에는 큰 문제였다. 기본으로 돌아 가려면 재활의 말 뜻부터 살피고, 치료 과정을 환자에 대한 '교육과 훈련'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런 뜻을 깨닫게 되자, 재활에 대한 의욕이 솟구쳤다.

우선 생활의 근거지였던 전주 집 근처에 있는 재활병원에서 재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 병원은 별도 부담없이 노트북을 이용해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치료사들과도 인간적인 접근이 가능하여 그들을 상대로 재활에 대한 내 궁금증과 내 상태에 대해 차근차근 물어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커다란 수건을 목에 두르고 (운동 시 땀을 닦기 위해) 귀에는 MP3 이어폰을 꽂고 (의식이 없을 때, 소리를 통해 뇌에 자극을 주기위해) 운동 치료실에서 자율 운동을 했다. 이어 내게 배정된 치료시간이 되면 치료를 받고 끝나면 계속 자율운동을 했다.

병실에는 식사와 잠자는 시간 외에는 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렇게 병원 일과가 끝나면 저녁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면서 입은 옷을 세탁했는데 밸런스와 코디기능이 망가져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그 동작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병원의 양해를 구해 사복을 입었다. 또, 샤워 후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세탁하는 동작을 재활에 활용했다.

그리고 나면 병원 로비 의자(일과 시간이 끝나면 대개 TV를 시청하며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병실의 다른 환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에 앉자 인터넷을 이용해 재활 관련 자료를 찾으며 재활의 실체를 파악했다. 매일 시간을 정해두고 인터넷 검색에 몰두했다.

그렇게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기위해 도움을 받아볼 요량으로 재활 카페를 만들어 별도의 오프라인 모임도 만들었다. 이후에는 MT도 다녀오고 매일 공원에 모여 합동 운동을 하기도 했다. 무려 4개월 만에 의식을 회복한 부산의 K형이 내가 개설한 재활 카페에 가입해, 그를 만나러 부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관련기사: '넉 달 만에 깨어난 K형, 새로운 인생을 준비 합시다')

병원치료에 임하며 스스로 생각해 내고 설정한 '나만의 재활운동'을 하루도 쉬지 않고 실행해 나갔다. 그렇게 지속하다보니 내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으며, 그저 열심히 해야 된다고 다그치며 운동을 했다.

당시 재활병원 원장님은 지방의 국립대학 재활의학과 교수출신이었는데, 당시 MET(medical exercise theraphy)란 치료법을 독일에서 들여와 세미나를 하면서 병원의 치료사들을 교육시키면서 이를 병원에 도입하고 있었다. 내게도 그 치료가 처방되어 치료를 받아보았다. 그 치료는 기구를 이용한 운동이었는데 크게 보면 일반 헬스클럽의 운동기구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환자를 대상으로 한 기구다보니 더 안전하고 운동량이 세밀하게 조절 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느꼈다.

마음을 다잡고 재활에 임하던 때인지라 필사적이었다. 그 효과를 체감하게 되면서 그쯤하면 일반헬스 클럽에서 재활을 해도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MET를 도입한 원장님을 만나 퇴원을 요청했다. 이후 일반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며, 통원 치료를 병행했다. 사고 후 만 2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죽기 살기로 운동, 너무 힘들어 보여요"

푸쉬업 자세를 이렇게 잡기까지 4년 걸렸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담당 치료사의 자문으로 푸쉬업을 해 보니 엎드린 자세조차 잡을 수 없어 선 채로 벽을 집고 시작해 점차 경사를 늘려 주어 이 자세로 하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지금은 60회씩 5세트를 매일 한다.
▲ 푸쉬업 자세를 이렇게 잡기까지 4년 걸렸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담당 치료사의 자문으로 푸쉬업을 해 보니 엎드린 자세조차 잡을 수 없어 선 채로 벽을 집고 시작해 점차 경사를 늘려 주어 이 자세로 하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지금은 60회씩 5세트를 매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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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해서는 집 앞의 헬스클럽(찜질방 안에 있는)을 이용하며 운동을 했다. 아침이 되면 출근하듯 나가서 운동 후 찜질방에 있는 휴게실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수면실에서 한 시간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운동하다가 오후 6시 30분에 집에 들어오는 생활을 규칙적으로 했었다. 물론 통원치료를 병행하면서 재활운동을 진행했다.

당시 필사적으로 운동하는 나에게 어느 날 그 헬스클럽의 트레이너가 "운동을 좀 즐기면서 하세요, 죽기 살기로 하시는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만큼 죽기 살기로 운동에만 매달렸던 시간들이었다. 점점 스스로 재활하는 영역을 키워나가게 되었고, 운동 효과를 체감하면서 자신감도 커졌다.

조금씩 지인들도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레 현실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장애를 입으면서 경제력을 상실했던 내 상황을 파악하고 건강한 생활인으로의 복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장애를 입기 전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선샤인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간 몸에 체득된 재활 운동은 장소와 시간만 허락하면 언제 어디에서든 꼭 해야만 하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통원치료를 중단하고 운동하면서 내 몸에 맞는 자가 재활에 임하게 됐다.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인지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 했다. 또 무엇보다 평생 장애를 안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또, 내 사고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 형서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어야 했다. 자가 재활에 임해서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했다.

체간 강화 위해 실시하는 AB슬라이드 의료진에게 자문을 구하니 모두다 체간(體幹) 강화를 강조했다. 오랫동안 검색하고 주변에 알아봐서 시작하게 된 AB슬라이드는 1년여 만에 내 복근을 식스팩으로 바꾸어줬다.
▲ 체간 강화 위해 실시하는 AB슬라이드 의료진에게 자문을 구하니 모두다 체간(體幹) 강화를 강조했다. 오랫동안 검색하고 주변에 알아봐서 시작하게 된 AB슬라이드는 1년여 만에 내 복근을 식스팩으로 바꾸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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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당했을 때, 3살이었던 딸 형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 지난한 세월 동안 그렇게 치열하게 재활에 임해야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해하도록 설명할 능력이 내겐 없다.

8년째 수 없이 머릿 속에 그리며 이겨냈던 지난하고 힘겨운 시간들. 이제 내 목표는 하프 마라톤을 3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이다.  내 성취에 대해 전 과정을 익히 아시는 어머니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그간 내 노력에 대해 들은 최대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스스로 엄하게 다그치며 마라톤을 준비해 왔다. 오는 10월 14일 '제11회 김제 새만금 지평선 전국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서 기준 시간에 완주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8년의 가열 찬 투쟁으로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나서 그 지난한 세월동안 날카롭게 벼려 온 여러 일들을 하나씩 펼쳐 볼 예정이다. 처음 내가 빠졌던 절망의 나락에 있을 이 땅의 재활우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고 귀하게 체득한 재활 경험을 나누려 한다. 그것이 신이 내게 엄하게 부여하신 소명(召命)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티스토리에 중복 게재 합니다



#미만성 축삭 손상#11회 김제 새만금 지평선 전국 마라톤 대회#하프 마라톤 완주#서치식#하나님이 재활 주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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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2급 장애를 가진 전주시 공무원으로 하프마라톤 완주를 재활의 목표로 만18년째 가열찬 재활 중. 이번 휠체어 사이클 국토종단애 이어 장애를 얻고 '무섭고 외로워'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시즌Ⅱ로 필자의 마라톤을 마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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