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싫어하는 차창 관광
시청 구경을 끝내고 우리는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관광에 나선다. 그런데 이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차창 관광이다. 정말이지 차에서 한 번도 내리고 않고 이건 뭐 저건 뭐 하는 설명만 하고 지나간다. 아니, 이게 무슨 관광이야? 하지만 이게 패키지 여행의 현실이다. 잠깐 내려서 구경하자고 하면 시간이 없다, 돈을 더 내야 한다고 투덜거린다. 결국 우리는 그들과 실랑이를 하다 기분만 잡치고 만다.
볼거리들이 모두 올드 타운에 있으니 차라리 시간을 주고, 보고 오라는 것이 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요구하면 중간에 길을 잃는 사람들이 있어 안 된다는 것이다. 버스는 시청에서 의회로 향한다. 노르웨이 의회는 스웨덴 건축가 에밀 랑레트(Emil Langlet)에 의해 1866년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건물이 너무 커 정부기관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의회 업무가 많아지면서 이들은 이사를 갔고, 의회 규모가 커지면서 1959년 4층짜리 부속건물을 신축하기도 했다.
건물은 노란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건물 가운데 부분을 원통형으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감싸는 부분은 ㄷ자형으로 만들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건물 앞 정원에는 한 젊은이의 두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유래와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의회를 지나자 좌회전해 오슬로 대학과 국립극장을 지난다. 이들 길 앞에는 왕궁이 있으나, 정원 때문에 왕궁 건물이 잘 보이질 않는다.
스키 점프대가 있는 홀멘콜렌그리고는 오슬로 시내를 내려다봐야 한다며 시내 북쪽에 있는 홀멘콜렌(Holmenkollen) 지역으로 향한다. 홀멘콜렌은 해발이 371m로, 오슬로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공원, 스키 점프대, 크로스 컨트리 스타디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열차가 개통된 1900년부터다. 이때부터 좋은 조망,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등으로 최고의 주택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우리는 홀멘콜렌 공원에 내려 오슬로 시내를 조망한다. 시내가 온통 숲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내의 명소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그 이유는 명소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날씨가 나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또한 스칸디나비아식 목조 호텔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재개장을 위해 내부수리중이다.
버스를 탄 우리는 스키점프대(Holmenkollbakken)로 향한다. 홀멘콜렌 스키점프대는 1892년 21.5m의 높이로 생겨났다. 그 후 여러 번 개조되었고, 1952년 동계올림픽 스키점프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66년과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현재의 스키점프대는 2008년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때 안드레아스 코플러(Andreas Kofler)가 141m라는 스키점프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스키점프대는 옆에서 보면 커다란 미끄럼틀 같고, 밑에서 보면 긴 형태의 쓰레받기 같다. 정점에 선수가 서서 경사진 활주로를 따라 힘껏 미끄러지다, 하늘을 난 다음 바닥에 착륙하는 형태를 취한다. 지금은 여름이라 눈이 하나도 없지만, 겨울에는 이곳에 눈과 사람들의 탄성이 가득할 것이다. 선수들이 착지하는 지점 주위에는 관람석을 마련,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비 오는 비겔란 조각공원의 상징 모노리트 석주스키점프대를 떠나 시내로 다시 내려오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그동안 비교적 날씨가 좋았는데, 심술이 좀 났나보다. 우리는 이제 다음 행선지인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sparken)으로 간다. 이곳 야외공원에는 노르웨이의 대표 조각가 비겔란(Gustav Vigeland: 1869-1943)의 작품 212점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 가족, 삶과 같은 존재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어서 휴식보다는 사고를 필요로 하는 공원이다.
공원 북문에 도착하니 비가 꽤나 많이 온다. 우산을 쓰고 숲길로 들어서니 저 멀리 모노리트(Monolitten) 석주가 보인다. 우리는 북문으로 들어가 모노리트 석주를 보고 남쪽방향으로 내려갈 것이다. 공원 개념도를 보니 철문과 계단을 내려가면 청동으로 만든 분수대 조각이 있으며, 이것을 보고 나면 꽃밭을 따라 자연스럽게 다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 계속 남쪽으로 가면 정문이 나온다.
모노리트는 현대판 오벨리스크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석주로,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그곳에 기원과 주술성이 부여되었다. 석주는 조각이 없는 기단부(3.18m)와 조각이 있는 상단부(14.12m)로 구성되어 있다. 석주의 상단부에 조각된 인물은 모두 121명이나 된다. 이들은 신성하고 정신적인 저 높은 곳을 향한 염원과 갈망을 추구한다.
그런데 모두 벌거벗은 채 서로 끌어안고 있는 폼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과 절망에 싸여 절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절규가 들리지 않는다. 시인 유치환의 표현을 빌면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일부의 평자는 이 조각이 인간의 부활과 구원을 염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빗속에서 보아 그런 걸까? 내겐 부활과 구원이 아닌, 소리 없는 절규다.
모노리트 석주 주변에는 36개의 인간 군상 조소가 세워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부부, 가족, 연인, 친구, 아이들, 노인이다. 이들의 모습이 다양한 양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태어나서 늙어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일들을 묘사한 것 같다. 그것은 처음에 태어난 아이들의 무리를 표현하고, 마지막에 죽은 자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땅에 대고 거꾸로 선 두 여인 사이로, 두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가 기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역시 인생의 수레바퀴를 표현했구먼.
모노리트 석주 주변에 있는 '해시계(Sundial)'는 1930년에 만든 청동조형물이다. 구형의 물체 안에 숫자를 새겨 넣고, 수직 막대를 세워 시간을 가리키도록 했다. 이 조형물은 우리가 늘 보아왔던 해시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조형물의 받침으로 사용된 화강석에 새겨진 별자리가 더 눈길을 끈다. 서양식으로 전갈 자리, 쌍둥이 자리 등이 보인다.
그리고 '인생의 수레바퀴(the wheel of life)' 역시 1930년에 만든 청동조형물이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팔과 다리를 펴고 서로 껴안아 둥근 화환형태를 만들고 있다. 이 둥그런 원형이 영원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나는 이 조형물에 영원성(Eternity)이라는 단어보다는 윤회(Samsara)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여기서 계단을 내려가면 철문이 나온다. 그런데 이 철문도 예술품이다. 철문에도 인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건장한 남자의 모습과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세 명씩 짝을 지어 어디론가 걸어간다. 여성들은 삼미신으로 표현되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다. 철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청동조각상이 감싸고 있는 분수대에 이르게 된다.
분수대는 조각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1909년에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수대가 이곳 비겔란 공원에 위치하게 된 것은 1924년이다. 분수대 주변에는 20개의 청동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에는 나무와 함께 나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청동부조 바깥에는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이 동판 형식으로 양각되어 있다. 이것은 1936년에 만들어졌다.
분수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1947년이다. 분수대 주변 바닥에 화강석으로 된 모자이크를 설치함으로써 끝이 났다. 1800㎡의 넓이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바닥면의 문양이 마치 미로처럼 느껴진다. 인생이 미로처럼 얽혀 있음을 생각할 때, 이것도 역시 인생의 수레바퀴를 표현한 셈이 된다.
분수대를 지나면 길은 자연스럽게 다리로 이어진다. 다리는 폭이 15m, 길이가 100m나 되고, 다리 난간 위에는 58개의 청동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의 주제 역시 남녀노소가 이루는 가족과 가정이다. 이들 중 화난 아이, 링 속의 남자, 아이를 들어 올리는 남자 등이 눈에 띈다. 나는 '아이를 들어 올리는 남자' 조각상에 여자가 부족하다며 아내에게 아이의 발을 좀 받쳐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자 나름대로 멋진 그림이 된다.
그리고 다리의 양쪽에는 각각 두 개씩 모두 네 개의 화강석 석주가 세워져 있다. 석주의 상단부에는 도마뱀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여기서 도마뱀은 악마를 상징하고, 인간은 영원히 그들과 싸울 수 밖에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리 아래에도 아이들을 조각한 8개의 청동조각상이 있다고 하는데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비겔란은 어떤 사람인가?우리는 빗속을 한 시간쯤 거닐며 비겔란의 조각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빗속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뭘까? 북유럽의 우울한 자연 환경 때문일까? 작가 비겔란의 인생관 때문일까? 아니면 당시의 시대사조 때문일까?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려면 비겔란에 대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생을 조각공원 만드는데 바친 비겔란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1869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남쪽 끝 만달 지역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오슬로로 유학해서 나무 조각을 공부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비겔란 농장에서 일했다. 1888년 다시 오슬로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전문적인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1891년부터 1896년까지 쾨벤하운, 파리, 베를린, 피렌체 등을 여행했다.
이때 그는 로댕의 작업실을 자주 방문했고,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와 르네상스 예술작품을 깊이 연구했다. 이를 통해 그의 평생 주제인 삶과 죽음, 남녀 관계 등이 정립된 것으로 본다. 그는 1894년과 1896년 노르웨이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때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성당 복원 등에 참여하며 중세 예술작품과도 접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예술적인 관심의 폭이 넓어졌다.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비겔란에게 새로운 기념물을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많아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의회건물 앞에 세울 분수대였다. 이 작품이 우여곡절 끝에 나중에 비겔란 조각공원에 세워지게 되었다. 1924년부터 비겔란은 프로그너 공원 옆에 자신의 작업장을 마련하고, 1943년 죽을 때까지 비겔란 조각공원의 완성을 위해 헌신했다.
32만㎡의 비겔란 조각공원에는 그가 만든 212개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공원 옆에 있는 비겔란 박물관에 가면, 그가 조각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하는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나는 그 박물관엘 들르고 싶지만, 대다수 회원들은 밖에서 본 비겔란의 작품에 만족한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박물관을 생략하고 시내 중심부 해안에 있는 DFDS 크루즈터미널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