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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시작된 강. 그 강은 남도 오백 리 3개 도와 12개 군을 지나 이 땅을 아우르고 흐르는 섬진강이다. 섬진강은 자연이 만든 골짜기와 인간이 만든 댐 사이를 힘차게, 때로는 끊길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친다. 그리고 하동포구를 지나 바다에 이른다. 섬진강이 걷고 달리는 거리는 장장 225km.

그 섬진강 물길이 잠시 몸을 둥글게 말면서 품은 마을들이 있다. 그중 풍광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곳은 구담마을.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섬진강이 나은 시인 김용택 때문이었다. 책이나 인터뷰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본인이 자란 고향 마을을 '자랑'했다. 덕분에 가보고 싶은 곳 명단에 이 마을을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구담마을 주변은 '섬진강 시인의 마을'이란 별칭이 붙었다. 마침 여름휴가를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맑은 강가의 마을을 찾아봤다.

주소지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아무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구담 마을회관 앞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그래도 오지 마을이 맞기는 맞는지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아스팔트 도로가 불과 몇 년 전에 생겼단다. 슈퍼나 마트는 언강생심.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섬진강 물줄기를 굽어보는 마을

마을 언덕 위 당산나무들이 사는 작은 뜰, 영화의 배경이 될 만하다.
 마을 언덕 위 당산나무들이 사는 작은 뜰, 영화의 배경이 될 만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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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분위기 또한 오지마을처럼 호젓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지가 드물고 산비탈을 일궈 조성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약 스무 명으로 가구 수도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 60대를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살고 있다. '구담'이란 이름은 마을 앞 섬진강가에 자라가 많아 거북이 구(龜) 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란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에 아홉 군데의 소(沼)가 있다고 해서 구담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이곳은 마을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니 강 마을이고, 산에 기댄 마을이니 산골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회관 앞에 도착해 처음 만난 마을 사람은 회관을 청소하시는 50대의 '젊은' 아주머니. 관광객을 대상으로 숙소를 겸하는 마을회관을 운영·관리하신다며 임실이 고향이었던 아저씨와 도시에서 쭉 살다가 몇 년간 마을을 물색 후 이 동네에 귀농하셨단다.

'생활은 어떻게 하시냐'고 조심스레 여쭤봤다. 아주머니는 가정식 민박집을 운영하고, 그 좋다는 매실 열매를 도시에 팔아 생계를 꾸린다고 하신다. 구담마을은 약 20년 전부터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의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마을 내 수익 창출을 위해 하나둘 심게 된 매화나무가 마을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된 것이다. 덕분에 3월 말이면 매화가 피어 장관을 이룬다며 봄에도 꼭 와보라고 알려 주셨다.

한껏 몸을 구부린채 개울처럼 흐르는 섬진강과 구담계곡을 실컷 굽어볼 수 있는 곳
 한껏 몸을 구부린채 개울처럼 흐르는 섬진강과 구담계곡을 실컷 굽어볼 수 있는 곳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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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마을에 닿았다면 먼저 가봐야 한다는 언덕 위 정자에 올랐다. 할아버지 한 분이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 산바람을 쐬며 누워있는 넉넉한 정자 옆 언덕 위. 그곳에는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당산나무들이 여행자를 놀라게 한다. 발아래로 흐르는 섬진강과 마을들, 저 앞산과 계곡을 오랜 세월 지켜오고 있는 산신령 같다.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영화의 배경으로 나왔다 던데 가히 그럴만하다.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또 다른 반가운 소식은 마을 뒤 등산로와 마을 앞 섬진강변의 산책로. 특히 강변 산책로는 넓어서 자전거 타기에도 좋다는 말에 귀가 쫑긋 선다. 이 오지마을에 와서 저 풋풋한 섬진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되다니! 숙박을 하는 관광객들은 마을회관 앞 자전거 거치대에 묶여 있는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다.

풋풋한 섬진강변을 따라 달리다

섬진강변의 해맑은 풍경과 함께 흐르듯 달려갈 수 있는 소박한 산책로 겸 자전거길
 섬진강변의 해맑은 풍경과 함께 흐르듯 달려갈 수 있는 소박한 산책로 겸 자전거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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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낚시를 하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는 풍경이 강물처럼 풋풋하다.
 아버지는 낚시를 하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는 풍경이 강물처럼 풋풋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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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을 타고 떠나는 여행 때도 트렁크에 애마 자전거를 싣고 다니곤 했는데 역시 잘했다. 보너스를 받은 것만 같은 기분으로 달려간 섬진강변 자전거 여행길. 구담마을에서 마을마다 계속 이어지는 해맑은 강을 따라 구불구불 여유롭게 달렸다. 자전거 바퀴가 닿은 곳은 김용택 시인이 다녔다는 덕치초등학교. 이 작은 마을에도 산책로 겸 자전거길이 생기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여행의 즐거움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명상음악에 나오는 듯한 새 소리, 풀벌레 소리를 응원 삼아 들으며 인적없고 고즈넉한 강변을 달린다. 풍경도 감상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달리다 어디선가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물가에 놀러 온 어느 식구들이 보인다. 맑고 깨끗한 강물처럼 아이들의 표정도 귀엽고 해맑기만 하다.

막내둥이 아기는 이상한 헬맷과 까만 선글라스를 쓴 아저씨가 무서울 법도 한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웃기만 한다. 강변을 내내 달리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반가운 마음에 나도 바지를 걷고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아이들 아버지가 잡은 물고기들을 구경도 하며 잠깐이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강변엔 이렇게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 홀로 강가를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를 쓸쓸함에 빠지지 않게 해줬다.

풋풋한 강변에 어울리는 작고 좁은 임도는 강의 폭이 커지고 넓어지면서 도시에서나 봄 직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로 이어졌다. 보행로 겸 자전거 도로만 보면 깔끔하게 잘 만들었다 싶다가도, 그 옆을 흐르는 섬진강이나 주변 풍경을 보니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가 본 다른 지역의 새 자전거 도로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집을 한 채 지어도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을 추구했던 조상들의 지혜와 전통이 언제쯤 부활할지 아쉽고 안타까웠다.

시인이 살던 마을, 고향 삼고 싶네

마을회관 앞에 펼쳐진 통통하고 새빨간 고추들이 보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다.
 마을회관 앞에 펼쳐진 통통하고 새빨간 고추들이 보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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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이 어릴적 살았다는 집엔 늙으신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
 김용택 시인이 어릴적 살았다는 집엔 늙으신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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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서 개천으로, 혹은 개울로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섬진강가를 따라가다 보니 동네입구에서 큰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느티나무가 여행자를 붙잡는다. 구담마을 주민이 알려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고향마을로 그 이름도 정겨운 진메마을. 마을회관 앞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장에 내다 팔 오동통하고 새빨간 고추들을 말리고 있었다.

어르신들께 김용택 시인이 살던 집을 여쭤보니 가까운 골목 너머 기와지붕 집이라고 알려주신다. 손가락으로 집어 주실 만큼 가깝다. 이젠 다른 사람이 살고 있겠거니 했는데 동네 할머니는 시인의 어머니께서 아직도 그 집에 살고 계시다고 귀띔해 주셨다. 늙으신 어머니께 괜한 폐를 끼칠까봐 집 앞에서 조용히 서성이기만 했다.

작은 나무 대문은 없다시피 열려있어 집 마당이 다 보인다. 소박한 수돗가, 굴러다니는 호박 몇 개, 시인의 어머니가 외출시 사용했을 유모차 등 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리고 나무 대문짝에 시인의 이름이 당당하게 적혀 있는 문패는 아들을 사랑하고 자랑하고픈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낸다.

김용택 시인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마음은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그런 것 같다. 그가 어린이일 때 다녔다는 덕치 초등학교에 들어서자 그의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눈에 띈다. 섬진강변에 자리한 나무들이 담벼락을 대신하고 있는 올망졸망한 학교와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콩, 너는 죽었다

콩 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아침에 일어나 구담마을 정자에서 바라본 섬진강, 가히 선경(仙境)이다.
 아침에 일어나 구담마을 정자에서 바라본 섬진강, 가히 선경(仙境)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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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전거로 여행한 섬진강변의 마을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을 답한다면 역시 구담마을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곳의 풍경 때문이다.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마을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 당산나무와 정자가 있는 언덕으로 산책을 가니 선경(仙境)이 눈앞에 펼쳐지는 그곳.

커다란 수묵화를 보는 것 같고, 시간이 그만 멈춰버린 듯한 풍경. 섬진강 오백 리 물길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라는 평가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섬진강과 구담계곡, 마을에 필 매화꽃, 그리고 그 향기로 가득 채워질 봄이 벌써 기다려진다.

(숙박 등 여행 문의는 구담마을회관 : 063-644-9050)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8월 24일부터 26일까지의 여행기입니다.



태그:#자전거여행, #섬진강, #구담마을, #진메마을,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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