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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빈소의 영정사진.
 장모님 빈소의 영정사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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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어머니 같은 정을 느끼며 지내던 장모님이 향년 8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작년 7월, 신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주요 장기 몇 개를 떼내는 대수술을 하고 회복이 더뎌 마음으로 준비를 해왔으나 황망함은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가시질 않는다.

전북 군산 지역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태풍 '볼라벤'에 이어 가로수가 뿌리째 넘어질 정도의 강풍을 동반한 '덴빈'이 올라오던 지난 8월 30일(목)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충남 부여의 한 병원에 근무하는 아내에게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 정옥이(처제)가 전화를 해왔는데, 어제 오후 2시쯤 어머니(장모)가 위독한 증세를 보여서 부산대병원 응급실로 모셨답니다. 오늘은 낮 근무여서 며칠 휴가를 받아 조금 후에 출발하려고 하는데 부산에 가실 거예요? 간다면 집에 들러서 함께 가고요…."
"음~ 알았어, 나는 오후에 갈께…."

장모님과 마지막 만남이 되었던 지난 8월 3일 찾아뵈었을 때 병색이 짙어 체념했으나 막상 전화를 받고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다가 힘겹게 추스른 후 "나는 집 안을 정리하고 오후에 버스로 가겠다"며 안전운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모님은 죽으면서도 자식들을 보살피는구나!'

46세 때 모습. 배운 게 없어 과일장수를 포기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46세 때 모습. 배운 게 없어 과일장수를 포기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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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덴빈'의 영향권에 들어간 군산은 새벽부터 대문 앞 전봇대가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고, 폭우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은 궂은일을 예고라도 한 듯 온통 먹구름이요, 전깃줄 사이로 맴도는 회오리바람은 늦가을 장마에 구렁이 울음처럼 음산하게 들렸다.

정초에 어금니가 빠지는 꿈을 꾸고 아내에게 해몽을 곁들이면서 "아무래도 어머니(장모)가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하니까 굳은 표정으로 상념에 잠기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고, 구렁이가 울면 궂은일이 생긴다는데···. 이런저런 불길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부산에 오지 마세요. 날씨가 장난이 아니에요. 방금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가 조금 전(8시 40분)에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익산-장계 고속도로 완주 IC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고 있어요. 장례는 군산에서 치른다고 합니다. 영구차는 오후 3시쯤에나 도착할 것 같다니까 준비하고 있으세요···."

전화를 끊으면서 '장모님은 죽으면서도 자식들을 보살피는구나!'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아내가 차를 몰고 호남고속도로 논산IC에 진입하자 시야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고, 10분쯤 지나서 5중 추돌사고를 목격한 후로는 운전하기가 무서웠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모님 상(喪)을 주변에 알리느냐 마느냐로 고민이 되었다. 50년 지기에서 최근에 사귄 친구들까지 면면을 떠올리다가 이웃도 모르게 조용히 치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람들이 밖에 나가기조차 꺼릴 정도로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연이은 태풍 피해로 '내 코가 석 자'일 터인데 부담만 안겨주는 것 같아서였다.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으나 형식적인 안부인사만 나누고 끊었다. 장모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후 2시쯤 영구차가 장례식장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형님에게는 알려야겠기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빈소로 향했다.

장모님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들

막냇사위 스틸하우스에서 외손녀들 재롱을 지켜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2009년 여름)
 막냇사위 스틸하우스에서 외손녀들 재롱을 지켜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2009년 여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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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허락을 받으려고 아내를 따라 처가를 처음 방문했던 30년 전 겨울부터 최근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회한이 밀려왔다. 딸이 부자(富者)로 살기를 원하는 장모님에게 빚쟁이처럼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는지 모른다. 

고맙게 여겨지는 게 하나 있다. 신혼 시절로 기억한다. 하루는 장모님이 오더니 둘째 며느리 선을 보는데 그 자리에 나도 참석해서 평가해달라는 것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서 건너편 테이블에서 살짝 훔쳐보고 느낌을 전했는데, 사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러한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장모님은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이웃마을에 사는 10년 연상의 남편(장인)을 만나 혼례를 올렸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만주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2년 정도 살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환갑이 넘도록 소작농으로 살았다.

4년 전 이야기 도중 "애들 학교 보내느라고 빌려 쓴 '장려 쌀' 이자가 눈덩어리처럼 커질 때는 금방이라도 죽고 싶었는디, 집으로 온다고 하고 딴 동네 가는 길로 걸어갈 때도 있었당게…. 그런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라며 눈가에 물기가 돌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공식 교육은 받지 못한 서러움 때문인지, 장모님은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간척지 천막생활도, 남의 집 식모살이도 마다치 않았다. 급할 때 쓰려고 마루 밑에 숨겨놓은 '좀도리쌀'까지 공출로 빼앗아 갔던 일제강점기 마을 면장을 가장 저주했으며, 대통령 선거와 총선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 투표할 정도로 의식도 뚜렷했다.

"친어머니는 16년, 장모님과는 17년을 함께 살았네요"

막내딸과 막냇사위가 준비한 생일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2010년 생일날)
 막내딸과 막냇사위가 준비한 생일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2010년 생일날)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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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 삼일장으로 치러졌다. 4년 전 여름. 치자 콩국수를 만들어 먹으며 얘기 끝에 "아들·며느리와는 살아본 적이 없는디, 금쪽같은 손녀들과 막내딸 막냇사위에게 대우받음서 10년 넘게 살고 있으니까 부러운 게 없고, 험헌 꼴 안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며 허허롭게 웃던 장모님. 그래서인지 입관 때 본 장모님 얼굴도 잠든 아기 얼굴처럼 평화롭게 느껴졌다.

입관예배를 보면서 눈물을 가장 많이 보인 사람은 막냇사위.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열여섯 살 때부터 친어머니와 헤어져 살았는데, 장모님과는 17년 넘게 지냈다"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막내딸은 "훗날 시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모시겠다"는 말로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9월 1일 오전에는 추모객과 자녀들이 애통해하는 가운데 사자(死者)가 빈소를 떠나는 절차인 발인예배를 보았다. 10년 전, 장인 봉분과 나란히 가묘(假墓)까지 조성해놓았으나 주민의 반대로 군산 시민묘지로 모셨다. 그래도 장모님이 태어나 자란 마을(고척리)이 아슴하게 보이는 자리이고, 탈골 후 이장한다고 해서 위안이 되었다.

하나님 품에서 편히 쉬기를 기원하는 하관 예배를 마치고 장지에서 내려오는데, 4년 전 가을 장인 추모식 때 고향을 방문해서 자신이 묻힐 가묘의 잔디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가 죽으믄 들어갈 자리가 여기고만"이라며 흡족해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알곡이 영글어가는 계절에 접어든 하늘은 언제 태풍이 왔었느냐는 듯 청잣빛이었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국화꽃가루를 뿌리며 전송하는 외손녀
 외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국화꽃가루를 뿌리며 전송하는 외손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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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장모,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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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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