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012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서울 곳곳에서는 ‘마을공동체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4일 오전,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서울 강북구 수유마을시장. 옷 가게, 만두집, 이불집, 신발 가게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풍경은 여느 전통시장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골목 한쪽에 수유마을시장의 명소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10년 12월에 개관한 '작은도서관'이다.
수유마을시장은 인근의 건물형 수유시장, 수유재래시장, 수유전통시장을 묶어 붙인 애칭이다. 세 곳을 합치면 점포가 350여 개, 상인과 직원이 1000여 명, 유동인구만 하루 1만 3000여 명으로, '시장으로 이루어진 마을'인 셈이다.
"돈만 아는 무식한 상인"?... 생선가게 사장님, 도서관 관장 되다 어떻게 시장통에 도서관이 들어서게 됐을까? 도서관은 올해로 20년째 생선가게 '강북수산'을 운영하고 있는 이재권(50)씨의 손에서 시작됐다. 인문학 분야 책을 즐겨 읽던 이씨는 인근 상인들과 서로 책을 빌리고, 빌려주다 상인들이 책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장 곳곳을 돌면서 책을 대출해주는 '책수레'가 상인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힌트를 얻었다. 책수레는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인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시장문화활력소'의 아이디어였다. 시장문화활력소는 전통시장의 문화 콘텐츠를 발굴하고 기획하는 단체로 2009년 6월부터 2011년 말까지 수유마을시장의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재권씨는 시장문화활력소와 함께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상인들에게 책을 기부받고 사비를 보태 상인회 사무실 옆 창고를 지금의 도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13평 남짓 크기의 도서관이지만 문학, 경제, 사회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구비했다. 보유도서는 3000여 권. 이씨는 "상인들은 돈만 아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었다"면서 "특히 문화에 대한 감각이 있는 30, 40대 젊은 상인들이 도서관은 꼭 필요한 장소가 됐다"고 귀띔했다. 생선가게 사장이었던 이씨는 도서관 관장 직함도 갖게 됐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시장에서 큰돈 벌어 다른 데 건물 하나 사서 월세나 받으며 살고 싶어 하잖아요. 20~30년 동안 시장에서 아이들도 키우고 살았으니까 번 돈의 일부분을 시장에 뿌려주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명감을 갖고 도서관을 만들었어요." 이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손진미(33, 가경정육점)씨는 "정신없는 시장통에서 도서관 덕분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며 "도서관과 시장은 '극과 극'처럼 보이지만 이제 상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휴식처가 됐다"고 말했다. 손 사장은 "상인들끼리 무슨 책을 보느냐며 묻고 추천하기도 한다"면서 "장사하기 바쁜 상인들 사이에 대화의 문을 열어주는 게 도서관"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시장도서관이 상인-주민 이어주는 '사랑방'으로
개관 1년 반이 지나면서 작은도서관은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다. 이재권 관장은 "시장 상인들끼리, 상인과 손님들끼리 시장 안에서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소주 한잔 마실 공간밖에 없었다"면서 "(도서관이) 책을 보는 공간이자 손님과 상인들에게 만남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서관은 상인은 물론 '시장 고객'인 인근 주민에게도 개방된다. 도서관 회원으로 가입하면 누구나 책을 빌릴 수 있다. 이날 도서관을 찾은 임명희(55, 서울 강북구)씨는 도서관 이용이 곧 시장 '애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임씨는 "상인과 도서관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무척 반갑더라"며 "도서관을 이용하면 할수록 대형마트는 피하게 되고 시장의 단골집을 찾게 된다"고 덧붙였다.
임씨는 작은도서관의 장점으로 책 '대출 인심'이 넉넉하다는 점을 꼽았다. 규정에는 대출 기간이 2주지만 2주가 넘어도 반납을 독촉하거나 벌금을 부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임씨는 "물건 살 때 상인들이 덤을 주는 것처럼 도서관에도 덤이 있는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 가지니까 장사도 더 열심히"
지난해를 끝으로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마무리됐지만 시장활성화를 향한 열기는 식지 않았다. 시장 카페 '다락방'에서 열리는 서예, 전통춤인 한춤, 글쓰기 등의 모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공연 동아리로 이뤄진 문화예술단이 시장에서 공연을 열어 큰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인근 초등학생들의 '어린이 시장탐험대'가 시장을 방문한다. 상인들이 선생님이 돼 아이들에게 생생한 경제 수업을 연다.
4일 오전, '다락방'에서는 다음 날 있을 외부 공연을 준비하는 한춤 연습이 한창이었다. 오승연(64) 강사의 지도로 김금순(62), 문숙희(65), 현교분(63)씨가 분홍치마를 입고 국화가 그려진 부채를 든 채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디뎠다. 김금순씨는 주민, 문숙희·현교분씨는 상인이다.
"다시 할게요. (전면 유리 거울을 보며) 여기가 중앙이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맞춰야 해요. 지금은 너무 한쪽으로 쏠렸어요." 언뜻 보면 어렵지 않아 보이는 동작이지만 이들은 자세 교정과 정신 집중에 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현교분씨는 "한춤이 손짓,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근육도 잡히고 구부정한 몸을 바로 서게 해준다"면서 "2년 동안 동아리 하면서 평생 함께하고 싶은 언니, 동생을 사귀게 됐다"고 말했다.
문숙희씨도 "전에는 굉장한 몸치였는데 전통 장단을 맞추고 박자를 알아가면서 리듬을 알게 됐다"며 "끼가 있는 사람만 춤을 추는 줄 알았는데 저 같은 사람도 춤을 배울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문씨는 시장에서 옷가게를, 현씨는 옷수선 가게를 운영한다. 한춤 연습이 끝나자 문씨는 곧장 자신의 가게로 달려갔다. 늦었지만 가게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30년째 여성 옷가게를 해온 문씨는 "전통시장 상인이라면 한겨울에도 목도리 두르고 죽자사자 장사만 하는 사람인 줄 아는 선입견이 있다"며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전통시장도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가게 영업에 지장이 없게 하려고 문씨는 연습이 있는 날이면 한 시간 일찍 시장에 나온다. 더 부지런해야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씨는 "옆집 상인, 대형마트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느긋한 마음을 갖기 어렵다"면서 "동아리 시작하고 나서는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게 되니까 장사도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 전했다.
'문전성시' 한계 보완한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
문숙희씨의 말처럼 상인들에게 시장은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터다. 때문에 시장에서 취미를 찾는다는 게 쉽지 않다. 이불집을 하는 박진희(40)씨는 "지역 주민과 함께 문화예술단을 만들어 공연하는 모습은 좋지만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동복을 파는 강창규(48)씨도 "축구 동아리 하나도 하기 어려운데 다른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며 "100명의 상인에게 똑같은 것을 바랄 수는 없기에 각자 자신의 여건에 맞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인들은 '자영업자'라는 특성 때문에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재권 관장은 "상인들은 혼자 장사를 하는 1인 사장들이라 자기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하다"며 "다른 사람의 강요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인들의 단합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2년 동안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전민정 매니저(시장문화활력소)는 "상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활동을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매니저는 "문화예술활동을 중심으로 벌인 프로젝트에 상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유통경제 분야 사업을 더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상인의 직업적 특성에 맞는 활동으로 다가가야 시장 공동체가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수유마을시장에서는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를 고려한 새로운 시도가 진행된다. 지역 주민들과 이재권 관장이 중심이 되어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 '마을예술창작소' 분야에 지원할 예정이다. 마을예술창작소는 전문 예술인이 아닌 생활형 문화로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문화 창작활동 공간을 뜻한다.
지원 사업에 참여 중인 이진숙(41, 서울 강북구)씨는 "문전성시 프로젝트처럼 전문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갈 예정"이라며 "고추장, 된장을 담그고 함께 나누는 등 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생활형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공모 사업에 선정되면 기존의 동아리 활동에 상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물놀이·요가·명상 프로그램을 추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