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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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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가 내년도부터 재수강 제도를 폐지할 방침이라는 소식이 9월 11일자 <한국경제>를 통해 보도되었다. 교무처장은 서둘러 오보라고 해명했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연대총학생회 측에서는 해당 기사를 보도한 기자에게 연락해 '교무처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임을 밝혔다.

불황으로 취업 문이 좁아지고 기업이 대학의 '학점 인플레'를 성토하고 나서자 학사제도도 점차 학생들에게 까다롭게 개정됐다. 상대평가가 확대되고 졸업인증제가 도입된 것 등이 예다. 이번 재수강 폐지 방침 역시 기업 입맛에 맞게 학생들을 더 효과적으로 줄 세워서 학교가 부여하는 학점의 공신력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재수강은 학생이 선택할 권리다. 재수강 폐지는 낮은 학점의 책임을 전적으로 학생 자신의 나태함 때문으로 돌리고 재도전 기회를 박탈하는 조치이며 경쟁 교육 강화의 맥락에 놓여 있으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학생들이 재수강을 '보험'으로 여겨 수업에 불성실하게 임한다?

"대학생이 노느라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매도가 지금처럼 부당하고 억울한 때도 없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고용 불안정과 때맞춰 겹친 경제 위기로 유례없이 좁아진 취업 문 탓에 대학생들은 전에 없이 극단적인 경쟁 압박에 내몰려 있다. 오히려 대학생들이 대학 생활의 낭만과 대학 문화조차 잃어버린 채 수업과 학점에 목을 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재수강은 학생들에게도 쉬운 선택이 아니다. 단과대에 따라서는 한 학기에 주어진 18점 정도의 학점을 빠듯하게 채워 이수해야 간신히 8학기 안에 졸업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한 과목을 재수강한다는 것은 이미 들은 학점 중 3학점을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이수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만큼 졸업 요건의 충족이 늦어짐에 따라 추가학기나 계절학기를 수강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추가학기나 계절학기를 수강하기 위해 추가로 내야 하는 등록금 역시 만만치 않은 부담임은 물론이다.

학생들에게도 재수강이 피하고 싶은 선택이라는 점은 통계 자료가 보여준다. 연세대 학내 언론인 <연세춘추>의 보도에 따르면 2010년과 2011년도의 재수강 비율은 8.17%에 불과하다. 대부분 상대평가가 적용되는 각각의 강의에서 적어도 30%의 학생은 C 이하의 학점을 받아야 함을 생각하면, 학생들이 학점이 낮다고 해서 쉽사리 재수강을 택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통계 자료에 따르면 재수강 경험자 중 78.57%는 학기가 종강하고 학점이 확정된 후에야 재수강을 결심했다(<연세춘추>). 재수강을 수업의 질 저하의 주된 요인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얘기다.

학기 중간에 재수강을 결심한 학생이 해당 수업을 포기하는 것조차 '놀기' 위해서는 아니다. 나쁜 성적이 예상되는 한 과목의 공부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다른 과목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얻게 된다. 취미를 가질 여유도 줄여가며 과제와 예습, 복습에 시달려야 하는 학생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전략적인 선택이다. 물론 오늘날 학생들에게 수업이란 더 이상 깨달음과 성숙을 얻는 과정이 아닌 단순한 학점 취득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학생의 인성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가? 교육을 수단화, 상품화하며 경쟁 교육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이며, 또한 자본의 이해에 영합하며 기업화되어가는 대학 당국이 아닌가?

1학년들의 수업 태도가 특히 불성실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 지적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중·고등학교와는 사뭇 다른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음 발을 들인 학생들이 약 한 학기에서 일년 정도 다소 산만하거나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입시 교육이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나라에서, '대학만 가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믿고 지옥 같은 교실을 견뎌낸 학생들이 '약속된 자유의 땅'에서 좀 방만해진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결코 옳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을 학년, 학번으로 구분해 저학년들을 희생양 삼는 것이 기존 재학생의 반발을 무마해서 비민주적이고 인기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학교 측의 '꼼수'라는 점이다. 이 꼼수는 올해 초 강행된 국제캠퍼스 'RC 계획(레지덴셜 컬리지: 교내 기숙형 대학)'에서도 이미 나타난 바 있다.

2006년 이래 6년 동안 여러 단과대로부터 반발에 부딪혀 표류돼 온 송도 이전 계획을, 현재 입학해 있지 않기에 반대를 표명할 수 없는 2013년의 신입생에게 떠넘겨서 해결해 버린 것이다. 비민주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학생들을 분열시키려는 학교 측 의도에 주목할 때, 학생입장에서는 학교 측이 퍼뜨리는 '저학년들이 논다'는 논리에 조금이라도 타협하지 말고 단호히 맞설 필요가 있다.

학점 인플레가 유발된다?

재수강생의 성적은 한 번만 수강한 학생의 성적보다 두 배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졸업이 늦어짐에 따라 인생 계획을 재조정해야 하는 부담과 추가로 내야 할 등록금의 걱정까지가 담긴 성적이다. 원론적으로 말해서 재수강생의 성적이 '세탁'이라고 폄하돼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들의 학점은 '거품'이 아니다. '인플레'라는 경제 용어는 전혀 잘못 적용되고 있다.

"초수강에서 낮은 성적을 거둔 것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낮은 성과를 개인의 나태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언제나 경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그럴듯한 논리였고, 언제나 부당하고 비현실적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특히나 더욱 그렇다. 이미 들은 과목을 다시 수강하는 노력을 들이며 남들보다 늦게 성과를 거두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은 충분히 '책임'을 지는 행동이다. '책임'이 꼭 '주홍글씨'여야 하는 건 아니다.

혹자는 "학점이 유의미한 척도가 되지 못함에 따라 공모전, 자격증, 인턴 등 다른 종류의 스펙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며 재수강 폐지를 주장한다. '다른 종류의 스펙'에서 경쟁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점'에서의 경쟁을 과열시키자는 주장이다. 결국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경쟁을 강요하는 지금의 교육과 고용 현실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셈이다. 본질을 비껴가는 이런 대안으로는 경쟁 과열에 따른 학생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

재수강으로 인해 비용이 낭비된다?

학교 측 관계자는 학생 재수강으로 인해 연간 최소 62억 원 이상의 수업료가 소비되어, "교육 투자 및 개발을 위해 쓰일 수도 있는 금전적 자원이 재수강에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연세춘추>). 여러 모로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재수강은 두 경우 중 하나다. 정규학기에 18점씩(혹은 성적 우수자의 경우 조금 더) 주어지는 학점 안에서 일부를 투자해 수강하는 경우거나, 추가학기나 계절학기를 신청해서 수강하는 경우다. 어느 경우든 학생이 수업료를 먼저 지불하고 나서 재수강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미 재수강 수업료를 다 받아 놓고서, 마치 학교의 돈이 일방적으로 지출되는 것처럼 말장난하는 것은 학생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최소 62억 원 이상의 수업료가 소비"된다면 그것은 학교가 아니라 학생들이 지출하는 가계 부담이다. 막대한 재단적립금을 쌓아 놓고도 어떻게든 재단 돈은 한 푼이라도 덜 쓰려 매년 막대한 등록금을 걷고 각종 사업 비용을 민자 유치와 학생 부담으로 충당하는 학교임을 생각하면, 이런 학교가 재수강에 따른 비용 지출을 걱정하는 것은 고양이 쥐 생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초수강 학생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연세춘추>는 한 반의 정원 60명 중 26명이 재수강생인 '경제학입문' 과목의 사례를 소개했다. 밀려드는 재수강생들로 인해, 반드시 교양과목을 수강해야 할 초수강생들이 수강신청에서 피해를 입었음 직하다. 이는 개설되는 강의의 개수와 정원이 실제 수요에 비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고, 이는 다시 학교의 고질적인 수업 공간 부족 문제와 연결된다.

여러 단과대에서 강의실 부족 문제를 수년째 호소해오고 있지만, 학교는 학생들의 교육권을 실질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사업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백양로 프로젝트와 같이 학교에 상업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업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 학교는 매해 수강신청 전쟁을 치르는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켜줄 수 있도록, 수업 공간을 확충하고 교원을 충분히 고용함으로써 개설 강의 수를 확대해야 한다.

재수강생들이 성적 순위의 윗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초수강생들을 낮은 성적으로 내몬다는 불평도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과목에서는 초수강생과 재수강생을 분리하여 별도로 등수를 매기기도 하는데, 이 경우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재수강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또다시 낮은 학점을 받고 삼수강을 선택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학생들이 실제로 노력한 것과 상관없이 무조건 30%를 추려 C 이하의 학점을 줘야만하는 상대평가 제도의 모순에서 기인한다. 학점 비율을 인위적으로 고정하는 어떤 성적평가 제도도 이 같은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줄 세우기만을 위한 성적평가 제도인 상대평가를 폐지하고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한다.

경쟁 대신 자율과 권리를...

기업화된 대학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면서, 경쟁 대학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대학 경영자들의 탐욕은 학내민주주의를 침해하고 학생들의 권리를 축소하며 학생들 간에 극한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이중의 경쟁 압력이 학생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카이스트에서 스러져 간 안타까운 목숨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또 다른 한 편에는 경쟁에 참여할 기회조차갖지 못한 채, 단지 대학에 다니는 것만을 위해 비정규 노동을 전전해야 하는 학생들이 있다. 재수강 폐지는 경쟁의 안과 밖에 있는 학생들 모두에게 기회의 폭이 좁아지는 일이다.

재수강 폐지를 통해 교육의 질이 향상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재수강 폐지는 충분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밀려 낮은 학점을 받게 된 학생들의 재도전 기회를 박탈하고, 본인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여러 사정 탓에 학업에 전력투구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좋은 학점을 받을 기회를 제한한다. 이처럼 노력할 의지가 있는 학생들을 떨어뜨리고 좌절시켜 억지로 줄 세워 순위를 매기는 조치가 학생들의 교육권을 배려하는 제도일 수는 없다. 이것은 단지 대학의 경쟁 논리로 학생들을 희생시키는 조치일 뿐이다.

대학이 중등교육기관과 다른 점은 학생이 자신의 학업과 생활에 대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대한 책임감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학생들에 대한 여러 규제를 완화하여 선택권을 폭넓게 제공해야 하며, 강의실을 확충하고 강사를 고용하는 데 투자하여 학생들의 학업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강의 수를 늘려야 한다.

또한 과중한 등록금을 낮춰 경제적 부담이 학생들에게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이 자신의 학업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재도전 기회를 막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레프트21, 연세춘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연세대학교, #연세대, #재수강, #대학, #경쟁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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