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崔智恩)씨는 경주 최씨로 1971년 12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이름에 한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실제 이름이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본다. 생후 2년만인 1973년 12월 11일 그녀는 친할머니 품에 안겨서 서울 중구 필동경찰서로 보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때부터 1975년 5월 10일까지 충현고아원에서 약 1년 반을 생활하다가 홀트를 거쳐 같은 해 10월 벨기에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최지은씨가 해외입양보내기 전 의료기록엔 "눈이 심하게 감염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3년 만에 방문한 모국
지난 2004년 입양 보내진지 33년 만에 그녀는 한국홀트를 처음 방문해 친부모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홀트에서 자신에 대한 기록은 달랑 '친권포기'라는 네 글자만 보여줬다. 다른 입양인들은 실제 '친권포기' 각서의 원본 혹은 사본에 부모님 이름, 주민번호, 주소 등이 적혀 있었지만 최씨 경우는 별도로 된 장부에 '친권포기'라는 네 글자 외에 자신의 뿌리인 부모에 관해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최지은씨는 홀트가 자신의 부모에 대한 기록을 관리소홀로 분실한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은폐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한 인간의 뿌리에 대한 기록이 그저 '친권포기' 4글자에 불과한 것일까? 최지은씨는 기자에게 "제 친부모님을 찾아 주십시오" 라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그래서 2004년 이후 최지은씨는 다시는 홀트를 방문하지 않으려했다. 홀트의 무성의한 답변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어느 해외입양인 모임에서 만난 한 해외입양인이 최지은씨에게 "처음 홀트에 갔을 때는 나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2번째 방문했을 때는 새로운 기록을 주더군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실 같은 희망을 갖고 지난 2005년과 2007년 2번째와 3번째 각각 한국 홀트를 다시 방문했다. 그러나 실 같은 희망과 용기를 갖고 2번째와 3번째 각각 홀트를 방문했지만 역시 모든 것이 허사였다. 최씨에게 주어진 친부모에 관한 기록은 이번에도 '친권포기'라는 4글자가 전부였다. 이것이 그녀가 홀트를 방문한 마지막 이었고 2007년 이후 그녀는 다시 홀트를 방문하지 않았다.
최지은씨 밸기에 입양부모는 현재 71세와 68세이며 친아들 하나가 있다. 입양부모는 1970년 첫 아들을 낳고 그 후 입양모가 2번이나 유산되자 결국 1975년 한국에서 최지은씨를 해외 입양한 것이다. 양부는 공무원 양모는 회사원이었고 지금은 두 분이 은퇴하여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벨기에 오빠는 지금 컴퓨터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 생각에 울음 멈출 수 없었습니다!"최지은씨는 지난 2007년 2번째로 양부모와 함께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YTN TV에도 출현했다. 또 지난 2008년에는 다시 3번째로, 벨기에 오빠와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친부모를 찾는데 실패 했다.
http://www.ytn.co.kr/global_korean/global_view.php?s_mcd=1201&key=200712281005344359 그녀가 한국을 방문하고 벨기에로 돌아가면 몇 주간은 계속해서 한국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으로 솟구쳐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벨기에에선 한국에 대한 추억과 향수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다.
벨기에에서 입양인으로서 최지은씨는 아주 조용한 아이였다. 벨기에 아이들이 다르게 생긴 외모 때문에 자기를 괴롭혀도 그녀는 아무하고도 충돌하지 않고 그저 1년 365일 조용하게 지냈다. 그녀의 10대에, 겉으로는 아주 조용한 모범생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끊임없는 두려움, 불안감 그리고 지나칠 정도인 조심성 때문에 괴로워했고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마음속에서 항상 솟아났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부를 잘하는 조용한 모범생이었지만 그녀 10대는 불행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벨기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최지은씨는 레스토랑, 양노원, 요양원, 노숙자를 위한 쉼터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 고등학교 때 공부도 잘하고 독서를 즐겨하던 최지은씨에게 기대를 많이 하던 입양부는 대학도 포기하고 그저 힘든 일과 임시직을 전전하는 딸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입양부는 최씨를 불러서 조용히 말했다.
"애야, 이제 그런 일을 그만두고 대학을 가서 번듯한 직장을 갖고 결혼해서 애도 낳지 그러니?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니? 공부도 잘하고 학구적인 애가 왜 그러니?" "확신과 자신감이 없어요"그러나 최지은씨는 결혼에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에 인생에 아무런 자신감이 없었다. 그리고 요양원이나 양노원, 노숙자를 위한 쉼터 등에서 일하는 것이 몸은 아주 고되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하고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이해가 가지 않는 딸에게 입양부는 크게 실망했고 많은 경우 그런 실망감을 딸에게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98년 최지은씨와 아주 가까이 지내던 벨기에 외할머니, 입양모의 엄마가. 노환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입양부모와 친척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거동이 어려운 최씨 벨기에 외할머니를 노인들을 위한 요양시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최씨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할머니를 전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마세요." 가족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런 힘든 일을 선뜻 하겠다고 나선 최지은씨를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녀 요청을 받아들였다.
최지은씨는 어려서부터 왠지 이 벨기에 할머니가 무척 좋았다. 벨기에로 입양 보내지고 얼마 안 되던 시절 그녀는 처음 본 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아직도 살아 계세요?"라고 물었단다. 벨기에 가족은 아마도 최지은씨가 한국에서, 고아원에 살기 전, 한국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최씨는 어렸을 때 한국에서 할머니와 마당에서 지냈던 것 같은 묘한 기분이 어렴풋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노인들과 양노원이나 요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
하여간 1988년부터 2003년까지 최지은씨 무려 5년 동안 자원해서 벨기에 할머니의 대소변을 거두며 정성껏 돌보아 드렸다. 그러다가 2003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최씨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모국방문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4년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해외입양 보내진 지 33년 만에 무작정 모국을 방문한 것이다.
최지은씨는 한국에 사는 것이 너무 좋다. 벨기에서 겪은 인종차별도 없고 한국인과 섞여 있으면 아무도 자기가 벨기에인 사람인 것도 모르고. 그러나 언어장벽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경희대학교에서 한국어를 1년간 배우기도 했다. 그 덕에 이제는 한국어도 제법 할 줄 안다.
노숙자를 위한 자원봉사 하면서 큰 보람 느껴처음에는 무작정 좋아했던 모국이었지만 한국에 좀 살면서 최지은씨는 전에는 못 보던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점도 보게 되었다. 장시간근로, 살벌한 경쟁위주의 교육, 열악한 복지시설, 사회양극화 문제 등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최씨는 한국사회에 애착이 간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면 그녀는 아예 노숙자시설, 여성들을 위한 쉼터 등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녀는 많은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말 못할 불안감, 근심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나는 영원히 친부모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어두운 생각이 들 때 그녀는 마치 삶 자체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기자는 최지은씨가 부모님 찾기를 포기하거나 단념하면 마치 자기 삶도 포기할 것 같은 우려가 든다. 그래서 지금 최지은씨가 마치 최후의 발버둥을 치는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든다.
최지은씨는 자기는 삶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기자에게 담담히 말했다. 기자는 그녀가 친부모를 찾으면 자연히 삶에 대해서도 확신을 얻을 것 같은 어떤 강렬한 느낌이 든다.
"한국에 중독되었어요!"오는 10월 7일 그녀는 한국을 떠나 벨기에로 돌아간다. 최지은씨는 자신을 "한국에 중독된 사람입니다"로 표현한다.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어,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이 좋아요"라고 말한다. 영어, 불어, 네덜란드어, 한국어를 말할 줄 아는 그녀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기 위해선 자원봉사보다는 직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자신의 어학실력을 활용 할 수 있는 관광안내원을 지원했지만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다 낙방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번에 벨기에로 돌아가면 그녀는 돈을 모아서 내년에 한국을 다시 방문할 예정이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항상 한국을 방문 하는 꿈을 꾼다. 자다가 한국에 있는 꿈을 꾼 적도 많다. 그녀에게는 정말 한국이 "꿈에서 조차 잊을 수 없는 나라"인 것처럼 보인다. 최지은씨는 "돈이 있다면 한국에 더 자주오고 싶고 아예 한국에 살고싶어요" 라고 말한다.
다음은 최지은씨가 지난 19일 기자와의 인터뷰 중 한국정부와 한국친부모님에게 전해 달라며 남긴 말이다.
전 한국정부를 이해 할 수 없어요, 어떻게 자국민이 낳은 아이를 돈 받고 외국에 보낼 수 있나요? 아기는 생산품이 아닌데 말이지요. 정부 역할은 국민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자국민의 아이를 돌보지 않고 외국에 판매합니다. 한국정부는 해외입양인에게 머리 숙여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한국정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 저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분노가 없습니다. 단지 부모님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당신들은 제 역사이고 뿌리입니다. 건강 하신지도 궁금합니다. 저에 대한 양육을 포기하셨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셨겠습니까. 저는 항상 어머님 생각을 합니다. 저를 버렸다고 자책하시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마십시오. 얼마나 살기가 어려우셨으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충분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전 제 코, 눈, 귀가 누구를 닮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서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혹시 그분들이 코나, 눈, 귀가 저를 닮았는지. 혹시 그 분들 중에 제 친척이 있는지...부모님이 저를 만나기 싫으시다면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상에 누구와도 다르게 생긴 저를 낳아주신 당신들이 정말 보고 싶군요. 아무쪼록 부디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딸 최지은 올림최지은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3210-2452) 으로 연락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