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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겉표지
 오항녕의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겉표지
ⓒ 너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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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작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비롯해서 광해군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요즘은 마치 광해군이 개혁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19세기까지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폭군으로 평가받았던 광해군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주적 실용주의 외교를 추진한 개혁군주로 극적 반전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심지어 광해군을 '민족 화해와 통일의 거울' 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해결할 지혜를 줄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광해군 평가에 대한 이러한 반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과연 이러한 평가가 옳은 것일까?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의 저자인 전주대 사학과의 오항녕 교수는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광해군을 개혁군주로 평가하는 흐름에 반기를 든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혼자서 과감히 '아니오'를 말하겠다는 것이다. 뭇매를 맞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왜 '아니오'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일까.

오항녕 교수는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철저한 고증과 전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한다. 국가기록원에 근무하면서 누구보다 기록관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컸던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과 문헌들을 비교, 분석해서 광해군을 평가한다.

저자에 따르면 광해군에 대한 평가의 반전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 간사를 지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1933년 펴낸 <광해군시대의 만선(滿鮮)관계>란 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고 평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나바의 해석은 이병도를 거쳐 20세기 후반 진보와 보수를 떠나 남북한 역사학계 모두에서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조선 문명의 경험은 무시한 채, 모든 사회가 근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근대주의 역사학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인조반정으로 그 근대로 나아갈 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인조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 광해군이 재평가받으며 부활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평가의 잣대가 근대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근대주의가 결코 보편적인 것도, 반드시 지향해야 할 가치도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근대주의의 잣대를 걷고 보면 광해군이 즉위했던 15년의 세월은 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패한 역사를 또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광해군 시대를 제대로 바라보고 오늘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승자의 역사는 없다

먼저 광해군을 개혁군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를 쓴 사람들이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이들이기 때문에 '승자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 기록에 관점이 개입되긴 하지만, 전적으로 승자의 역사라는 건 없다고 말한다.

'누가 편찬했기 때문에 그 사료를 믿을 수가 없다'가 아니라,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료 비판을 하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실록 편찬은 그 과정이 엄격하기 때문에 단순히 승자라고 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기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록은 왕이 살아있을 당시의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와 각종 공문서를 추려서 초고를 만들고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를 거쳐 편찬된다. 특히 <광해군일기>는 중초본(中草本)과 정초본(正草本)이 모두 남아 있어서 원래 기록에서 어떤 기록을 첨삭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또한 이나바를 비롯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모두 논거로 삼는 연구 자료가 <광해군일기>라는 점에서 <광해군일기>는 광해군을 비판할 수 있는 자료는 물론 광해군을 추앙할 수 있는 자료도 동시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자료를 해석하고 평가하는가'의 차이 아닐까.

대동법으로 민생안정? 오히려 방납 커넥션에 힘실어 줘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 리얼라이즈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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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세제개혁으로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어 민생안정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대동법.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서 시범 시행되었던 대동법을 광해군은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양반 지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일전에 신하들을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이 대략 선혜청 작미(作米)의 일은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대동법은 사실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중략) (본문 131쪽)

광해군이 유공량을 비롯한 북인들의 대동법 반대 의견에 동조하면서 한 말이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사실 광해군은 처음부터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원익의 주장에 마지못해 시행은 했지만, 이마저도 이원익이 유배를 가면서 흐지부지되다가 결국 채 1년도 안 되어 폐지 여부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최측근들이 방납으로 부를 축적한 양반 지주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당시 방납은 이미 고질적인 것이었고, 방납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왕실과 권력층에 촘촘히 얽혀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바로 광해군의 지지 기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광해군의 대동법 시행 의지에 맞선 방납배들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와 반대로 광해군이 측근들의 이익을 위해 민생에는 눈감고 대동법을 거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측근 비리가 문제인 것이다.

더 이상의 토목공사는 아니 되무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삽질'로 인한 민생파탄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왕권강화라는 일반적 해석으로 어물쩍 넘기지만, 저자는 광해군 집권기 동안 계속된 궁궐공사를 광해군 최대의 실정 중 하나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궁궐공사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웠던 전란 이후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교서에 두 번째로 거론한 것도 바로 이 토목공사에 대한 것이다.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라고 교서는 적고 있다. 물론 임진왜란 동안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지어 왕조의 위엄을 세우겠다는 뜻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전쟁으로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생각하지 않고 궁궐공사에만 올인하다시피 집착했던 것이다. 문제는 모든 토목공사가 그러하듯이 궁궐공사 역시 한두 푼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답은 뻔하다. 백성을 쥐어짤 수밖에.

4결당 1필을 거두던 결포를 1결당 1필씩 거두는 방안이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4결당 1필을 거두는 것도 평상시 전세의 25퍼센트 인상이었다. 그러니까 1결당 1필씩 거둔다는 말은 25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 인상이 추진됐던 것이다. 결국 조삼모사(朝三暮四), 1결당 1포를 두 번에 걸쳐 거두자는 의견, 혹 2결당 1포나 3결당 1포를 거두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복정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광해군은 이중 가장 세금이 무거운 방안, 즉 1결당 1필을 거둬 쓰라고 전교했다. (본문 292쪽)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광해군 9년(1617)과 11년 기록을 통해 저자가 계산한 바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궁궐 공사비로 전체 국가 예산의 15~25% 정도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국가 예산으로 본다면 이 정도 예산규모는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는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궁궐공사를 위해 국방을 포기한다.

광해군 11년, 후금이 한창 요동에서 기세를 올리던 그 때, 광해군은 국방을 든든히 하는 대신 군량미와 군기를 만들 정철까지 빼내서 궁궐공사에 사용하기에 이른다. 백성들을 쥐어짜고, 관직을 팔고, 공명첩을 팔고, 죄지은 이의 죄도 팔고, 군량미까지 빼서 그야말로 온 나라의 재정을 탈탈 털어서 한 것이 바로 궁궐공사였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그를 개혁군주라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실용이었을까.

정치인들은 자신이 불리할 때 흔히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란 어쩌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아닐까. 광해군이 개혁군주였는지, 폭군이었는지는 그 당시에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하긴 그 시대에 살았던들 알겠는가. 같은 유신시대를 살았어도 서로 인식들이 다르니.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조반정 이후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고. 반정은 그들이 선택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러므로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그 시절 사람들도 하루하루 삶을 이어갔을 것이라고. 결국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을 견디고 살아온 이름모를 백성들이라는 것. 바로 우리라는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2012년 9월, 1만7000원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2012)


태그:#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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