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도시 서울에서 보내야 하는 고향 없는 불쌍한(?) 도시인들의 연휴 보내는 방법은 서울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멀리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에서부터 고즈넉한 가을 산사에 들어가 명상에 잠겨 자신을 돌아보는 템플 스테이, 독서의 계절 가을답게 보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못 읽었던 책들 몰아서 읽기... 개중 풍성한 가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벼 익는 가을 들녘이 서울에도 펼쳐져 있다는 건 서울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를거다.
강서구에 있는 수도권 전철 9호선 개화역에 내려 2번 출구 방향의 작은 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보면 어느새 눈 앞에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고슬고슬 익어가는 논밭이 나타난다. '찌르르, 찌르르' 온갖 풀벌레들이 노래를 불러대고, 논 위로 수십 마리의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어지러이 비행 중이다. 마치 정성들여 잘 지은 밥 한공기가 놓여져 있는 듯 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황금 들녘이 펼쳐져 있다.
농부가 가꾼 눈물나게 아름다운 정원, 논
따스한 햇살과 함께 가을이 익어가는 요즘 같은 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지는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바로 '논'이다. 유홍준 작가의 좋은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기억에 남는 '주장'이다. 논은 단순한 아름다운 정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팔뚝에 잠시 닿기만 해도 델 것 같은 뜨거운 여름날의 햇살과 모든 걸 익사시킬 듯 쏟아지는 장맛비에 올해는 연이어 몰려오는 태풍들까지... 온갖 풍상을 겪어낸 키 작은 벼들이 대견하게 느껴지고, 그런 자연의 시련 속에서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낸 농부들에게 감사하게 되는 정원인 것이다.
그런 눈물나게 아름다운 정원 '논'이 여느 시골 농촌처럼 펼쳐진 곳이 서울에도 있다니 고향이 없는 내겐 고맙기까지 하다. (정확히는 고향을 잃어 버렸다는게 맞겠다. 서울 목동이 고향이기는 하나 내 어릴적의 목동과 지금은 너무도 달라 알아볼 수도 없기에)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태어난 나도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가을 들녘에 서면 흐뭇함과 배부른 풍요를 느끼고, 모내기가 한창인 논에서 수고하시는 농부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수천 년간 이어온 농경민족의 유전자가 내 몸 안에 씨앗처럼 심어져 있어서일 게다.
여느 농촌의 고요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와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종종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둥같은 굉음소리. 인근 김포공항에서 이륙하는 거대한 비행기 한 대가 머리 위로 속살을 내보이며 날아오르고 있다. 금싸라기 서울 땅에 이런 농촌 풍경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평소엔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보니 많은 사람들과 온갖 물건들을 실은 저 커다란 덩치의 금속물체가 달음박질하다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쌀 이외에도 유익한 점이 많은 논의 다양한 역할나처럼 선글라스에 레저용 복장과 모자를 쓴 어떤 아주머니가 어느 밭에 앉아 까만 비닐봉지에 밭작물들을 따서 넣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지리산, 북한산 둘레길 등지에서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주민들이 힘들게 심어 키워놓은 농작물을 마구 따서 가져간다는 얘기가 퍼뜩 떠올랐다. 조금 주저하다가 용기를 냈다.
"아주머니 이렇게 농작물 마구 따가시면 안 됩니다."말하고 나서 속으로 왠지 뿌듯해 하는 순간, 아주머니는 웃으시며 이곳이 대여받은 텃밭이란다.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주변에 있는 '개화 텃밭', '행복 텃밭' 등의 작은 나무 팻말이 비로소 눈에 띈다. 텃밭 여기저기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앉아 뭔가 조물거리고 있다. 무안한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날리며 별말도 하지 못하고 들녘 사이 좁은 농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빠름 ~ ♬
매일 밥을 먹고 있지만 쌀의 고마움을 잘 모르듯, 논이 하고 있는 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한여름에 쏟아지는 비를 머금어 홍수 피해가 나지 않게 하는 기능부터 지하수 저장, 수질 정화, 대기 온도 낮추기, 도시민들의 메마른 심신을 어루만져주는 것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게다가 들녘에서 마주친 부지런한 농부, 농모님들의 모습은 몸을 쓰지 않으려 하고 머리만 굴리며 사는 내 삶을 얼마나 돌아보게 해주는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민족과 더불어 있어온 논이다 보니 우리말에도 논과 관련한 재미있는 속담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락은 수확한 벼를 가리키는 사투리다. 추수를 하면 먼저 다음해 농사에 종자로 쓸 씻나락을 따로 덜어놓은 다음 나머지를 양식으로 사용한다. 그런 귀중한 씻나락을 귀신이 까먹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겠는가. 농부들이 굶어죽어도 손대지 않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씻나락이었다고 한다.
논 옆에 꼭 있는 작은 하천 '대두둑천'을 따라 이어진 둑길이 요즘 보기 드문 흙이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편의를 위해 농로에 아스팔트를 깔아 놓은 곳이 대부분인데 참 반갑다. 작은 하천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과 찬거리를 찾는 흰옷 입은 백로들, 논일을 하는 몇 몇 주민들 외에는 참 한가롭고 조용한 전원적인 길이다. 전철을 타고 1시간도 안 걸려 찾아온 동네인데 어디 멀리 푸근하고 정겨운 시골에 여행을 온 것만 같다.
호박 하나를 주워 뒷짐을 지고 벼들을 보살피고 있는 농부 아저씨에 의하면 추석이 끝나면 추수를 한다니 벼베고 낟알터는 들녘에 다시 한 번 와봐야겠다. 푹신푹신한 둑방 흙길을 천천히 밟으며 걸어가는 여유로운 가을 들녘길, 오동통 살이 찐 벼 이삭들이 나란히 고개를 숙여 여행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하는것 같다. '풍성한 가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