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균 <오마이뉴스> 기자의 추모식이 10월 3일 오전 5시30분께 서울 상암동 본사 빌딩 앞에서 열렸다. 이날 노제에서 동료 기자인 최경준 기자가 추모사를 낭독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편집자말] |
영균아!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네 이름을 불러놓고 한참을 담배만 피워댔다. 그리고 다시 네 이름을 부르려니, 가슴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래도 다시 네 이름을 불러본다. 부르고 또 불러서 네 이름 가슴에 깊이 깊이 새기려고 한다.
네 흔적이나 볼 수 있을까 해서 블로그를 들어가봤더니,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분류에는 이런 저런 목록이 있지만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대신 하늘을 보며 늠름하게 서 있는 네 사진 밑으로 시 한 구절만이 덩그러이 놓여 있었다.
나는이 세상에서가난하고 외롭고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태어났다네가 평소 좋아하던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였다. 네 덕분에 나도 백석의 시를 엿보게 됐지. 나는 그 다음 대목이 더 좋더구나.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넌 사랑하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늘 슬퍼했다. 술 마시면서 입버릇처럼 네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래서 기자 한다고. 그리고 넌 네 자신보다 사랑하던 후배들을 가슴으로 다그쳤다. 그렇게 하려거든 기자 때려치우라고. 그래서 또 나는 네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넌 천상 기자라고. 얼마 전 혼수상태에 빠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네 손을 잡고 내가 그랬지.
"취재하러 가자, 영균아."그리고 넌 산소마스크를 넘어서도 또렷이 들리도록 "응"이라고 말했다. 그래, 사경을 헤매면서도 넌 취재를 하러 가고 싶었던 게지. 그래서 넌 천상 기자다.
널 위해 만든 '김영균 펀드'... 우리 마음에는 종소리가 울렸다그리고 넌 <오마이뉴스> 기자다. 12년 전 넌 부산에서, 그리고 난 전주에서 <오마이뉴스> 지역판을 담당하며 함께 <오마이뉴스> 창간에 참여했다. 그리고 1년 뒤 너와 난 나란히 서울로 올라왔고, <오마이뉴스>에 우리의 치열한 30대를 고스란히 바쳤다. 그리고 늘 우리는 함께했다. 네가 사회팀에 있으면 난 정치팀을 했고, 네가 편집부에 있으면 내가 사회팀으로 갔고, 네가 정치팀장을 맡으면 내가 사회팀장을 맡았다. 네가 노조 위원장이 됐을 때, 나에게 노조 사무국장을 맡아달라고 하면서 했던 말 기억하니?
"우리가 젊음을 바친 <오마이뉴스>다. 우리가 열정을 바친 <오마이뉴스>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노조는 달라야 한다."<오마이뉴스>에 대한, 그리고 <오마이뉴스> 동료들에 대한 너의 유별난 열정과 사랑 때문에 넌 '김 반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는, 그 사람 곁에는 네가 있었다. 대신 너를 위한 시간도 없었고, 너를 위한 고민도 없었다. 그래서 난 너를 '바보 김 반장'이라고 놀렸지. '바보 김 반장', 늘 네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런 네가 너무나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네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난 4월 동료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널 위해 '김영균 펀드'를 만들었고, 얼마간의 돈과 편지를 보냈지. 네가 사랑하는 아내는 그날 페이스북에 "마음 속에서 종소리가 울린다"고 썼다.
그 종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기자상을 받은 동료는 기자상 상금을, 특종상을 받은 동료는 특종상 상금을 내놨다. 그리고 그 종소리를 너도 들었다고 했지. 며칠 뒤 네가 동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회사 내부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서 우리도 마음 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1년 넘게 지내는 동안, 몸보다 먼저 부서지는 게 마음이더군요. 참기 어려운 통증은 둘째 치고라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내일에 대한 걱정, 아이와 가족에 대한 미안함, 별 진전 없이 반복되는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대수술…. 한창 힘들 때는 모든 걸 다 놓고, 이젠 제발 몸을 그만 괴롭히고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지난해 1월 눈 많이 내린 어느날 네가 갑작스레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개복수술을 하고서야 간암임을 알았을 때, 그 암이 다른 장기와 뼈에도 전이됐다고 했을 때, 그래서 네가 수차례 수술과 수십 차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며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을 때, 우리도 너와 함께 아팠다. 너무 많이 아파서, 차마 네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병원 앞까지 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병실과 집을 오가는 동안, 늘 그리웠던 자리는 정리 안 된 제 책상이었습니다. 먼지 묵어 오래된 이면지들의 냄새, 컴퓨터 하드 돌아가는 소리의 적막감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네요. 아직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꼭 돌아가야 할 자리라고 확신하며 삽니다.이제 취재하러 가자, 아직 못다 이룬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
현장으로 돌아오겠다는, 아니 돌아오고 싶다는 네 글을 읽으며 우리도 기도를 시작했다. 그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네가 너의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놈이니, 그래서 우리에게 상처주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그렇게 기도했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때는 차가운 쇳덩이만큼 단단한 놈이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그렇게 기도했다.
저는 만약 <오마이뉴스>가 좌초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배에서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다른 선후배들도, 저보다 더 높은 이상과 꺾지 못할 자부심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무엇보다 <오마이뉴스>를 사랑하는 네가 <오마이뉴스>와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고 우리 모두는 믿었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넌 이렇게 가는구나. 또 다른 길을 가는구나. 어차피 우리 모두 가야 할 길이지만, 급한 성격답게, 넌 그렇게 먼저 가는구나.
그날 밤, 가늘고 거친 숨을 간간이 내쉬고 있는 너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내가 미국 생활을 마치고 올여름 오랜만에 회사에 와서 보니, 새로 온 식구들이 너무 많아서 낯설었다고. 그런데 그들과 눈빛을 마주치고,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건네는데, 나를 알아보더라고. 그리고 네 얘기를 하더라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너를 알고 있더라고.
그 말을 듣더니 굳게 닫혀 있던 네 입 주변에 살짝 미소가 지어지더라. 흐뭇했지? 이제 막 들어온 후배들도 <오마이뉴스>와 함께했던 우리의 얘기를 모두 알고 있다는 얘기에 뿌듯하고 행복했지?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명의 마지막 끈을 놓던 순간, 난 알겠더라. 네가 고통 없이 편안한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어제 오늘 일하기 억수로 좋은 날씨다. 이제 취재하러 가자, 영균아. 예전에도 그랬듯이 난 여기서, 넌 거기서 그렇게 우리 일을 하자. 아직 못다 이룬 우리의 꿈을 위해서, 아직 못다 이룬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
영균이를 가슴에 묻으며
2012년 10월 3일
친구 경준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