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의 막시스트(Marxist)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지난 10월 1일 9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1917~2012). 홉스봄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으로 인해 많은 비판과 조롱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그를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홉스봄은 점점 확대되는 불평등과 벌거벗은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체제는 결국 그 내부의 긴장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필연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설파했다. 즉 자본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인가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해, 서구에서 공산주의가 철저히 무너져내리는 80년대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로 남아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홉스봄은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이미 시작부터 실패가 예견되는 행로를 걸어왔음이 자명하다고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소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홉스봄의 이같은 일견 모순된 태도는 그가 1917년 10월 혁명이 세계를 위한 큰 희망이었다는 믿음을 간직한 세대였으며, 그가 혁명 그 자체를, 또한 그 혁명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배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어리석은 고집인지, 체념인지 아니면 대중적 시선을 넘어선 깊은 통찰과 이에서 비롯된 굳건한 소신인지 우리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스무 살 청년시절에 입문해 75년간에 걸쳐 공산주의 이념의 신봉자, 수호자로서의 일관된 삶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영국의 <타임스(The Times)>는 그의 막시스트적 시각이 영국과 나아가 유럽 좌파운동의 지형도를 새롭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중의 시위, 폭동, 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사회과학자이며, 자신의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철저히 파괴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결코 굽히지 않음으로써 '회개할 줄 모르는 공산주의자'(unrepentant communist)라는 꼬리표를 얻게 됐다고 언급했다.
<타임스>는 아울러 홉스봄이 60년대와 70년대 서구에서 좌파의 혁명적 행동주의를 위한 지적 지지대 역할을 하며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의 저작들이 방대한 자료와 세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많은 정치학도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전체주의적 공산주의(totalitarian communism)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는 점을 비판했다.
홉스봄에게도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는 시련의 순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56년 소련이 탱크를 몰고 헝가리의 시민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일에 좌절했다. 또한 스탈린 사후 집권한 후르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치며 스탈린 치하에서 자행된 범죄들을 공개했던 순간도 그에겐 힘든 시간이었다. 홉스봄의 스탈린주의 옹호가 졸지에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붕괴는 필연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이런 일들을 겪으며 그와 소신을 함께했던 지성의 친구들은 공산주의를 버렸다. 하지만 그는 '엉클 조', 스탈린의 옹호자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괜한 일을 하고 있다는 후회를 떨쳐내기 어려웠지만 홉스봄은 무엇인가 강한 힘에 이끌리듯이 묵묵히 그 진영을 지키는 '마지막 남은자'로서의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80년대 후반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9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힘찬 진군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2007년과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다시 눈을 뜨게 된 민중들에 의해 지난해 미국발 반월가시위, 아랍의 봄 등 혁명적 징후들이 나타나면서 세계는 다시 그의 존재를 떠올렸다.
홉스봄은 올해 초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본주의는 성장과 이윤 창출에만 관심이 있을 뿐 책임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비판했다. 95세의 노령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없이 맑고 간결했으며 조용한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잔잔한 경이로움 속에 나는 그 인터뷰를 지켜봤다.
그는 "지난 40여년간의 자본주의 체제는 아담 스미스류의 병리적 세대를 낳았으며 그들에게 자본주의와 책임감은 상호 관련이 없는 것이며 오로지 좋은 성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라고 꾸짖었다. 책임을 방기한 자유시장(free market)이 공짜(free)라는 인식의 천박성에 대한, 사라져가는 노병의 준열한 견책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홉스봄은 지난해 아랍의 봄과 관련해, 민중들이 다시금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하고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큰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의 혁명에 대한 젊은 꿈은 결코 시들지 않았다.
홉스봄은 아랍의 봄, 미국의 반월가 시위 등을 통해 200여 년의 시차를 넘어 프랑스 대혁명과 그 이후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발현된 민중봉기의 역사적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시민혁명 속에서 그는 막스의 공산당선언이 발표되면서 자발적이고 자력에 의해 굴러가는 혁명의 기폭제가 만들어졌던 1848년을 떠올렸다. 좌절과 후회, 조롱 속에서도 버터왔던 그의 삶과 소신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는 느꼈을까?
홉스봄에게는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반유태적 유태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민족적 혈연주의 따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통해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강조했고 탈민족주의를 통해 인류를 각자의 인종적, 국가적 정체성을 벗어나 진정한 보편주의와 휴머니즘의 세계로 진전시키려고 노력해왔다.
패권을 앞세운 국가간 갈등과 민족분규, 종교전쟁 등으로 얼룩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 진실하고 순수한 공산주의자의 존재는 외롭지만 강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홉스봄은 무수히 많은 저작들을 남겼지만, 특히 19세기 역사를 다룬 그의 삼부작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 1789-1848),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 1848-1875) 그리고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 1874-1914). 이 삼부작의 후속편으로 1994년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 '1914 - 1991, 세계의 역사'라는 부제가 달린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이다.
회개치 않은 공산주의 역사학자로 영원히 남다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지에 따르면, 홉스봄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집필작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저작 -죽기 석달 전에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던- <좌절된 봄(Fractured Spring)>이 내년 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홉스봄은 19세기와 20세기의 고전예술과 문화 전반, 종교, 정치적 선언들, 미국 카우보이의 신화 등을 포괄적으로 다룸으로써 20세기 문화와 사회에 대한 총체적 탐구를 시도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책의 구성 속에서 그는 20세기 과학과 기술혁명의 파장, 대중소비사회가 서구 경제의 잠재력 속에서 어떻게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는지, 엘리트 예술 그리고 미국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마초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쇠퇴하게 됐는지를 예리하게 조명했다고 한다.
홉스봄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지만 내년 3월 우리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저작을 만나 시공을 초월한 대화을 나눔으로써 그의 부재를 다소나마 위안받으리라 기대해본다.
이 글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에릭 홉스봄은 긴 생애 내내 그의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배경으로 무수한 보석 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제 그를 떠나보내며 그의 삶을 정리해야할 시간이다.
뉴욕대학교(NYU)의 토니 주트(Tony Judt) 교수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서, 에릭 홉스봄이 일생 동안 공산주의자로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는 단연코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로 평가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아울러 주트 교수는 "홉스봄은 그냥 역사학자라기보다는 회개치 않은 공산주의 역사학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부당하고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지고 갈 십자가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