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8일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거리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자제품을 사거나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은 아키하바라 대로로 흘러나와 주말을 만끽했다. 낮 12시, 아키하바라 역 근처 교차로에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20대 남자가 모는 2톤 트럭은 멈춤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 3명을 쳤다. 트럭은 10m를 더 움직인 뒤 멈췄다. 한 남자가 내렸고 손에 등산용 칼을 쥔 채 지나온 방향을 되돌아오며 무고한 시민 10명을 칼로 찌르기 시작했다. 7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 입었다.
'아키하바라 칼부림' 사건으로 회자되는 범죄를 두고 일본에서는 '도리마 살인'이라 불렀다. 도리마는 만나는 사람에게 재해를 끼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마물을 뜻한다. 그 당시 사건을 우리 언론도 상세히 보도하며 한국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드문드문 일어나기 시작한 국내의 묻지마 범죄는 최근 1~2년 사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2012년 올해만 10건이 넘는다. 제주 올레길 관광객 살해사건, 통영 초등생 살해사건, 의정부와 여의도의 칼부림 사건과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 등이 그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를 가하는 거리의 악마를 두고 처벌의 목소리가 드높다. 사회적 격리나 가중처벌은 물론, 화학적 거세나 물리적 거세와 같은 극단적 신체형에 대한 논의도 심심찮게 오간다. 일부에선 사형제라는 카드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날이 흉포해지는 범죄에 대해 사회와 국가는 더 강력한 처벌이라는 통제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궁금하다. 과연 강력한 처벌이 범죄를 뿌리 뽑을 수 있을까. 나아가 처벌 혹은 제도적 교화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 안에 있는 악(惡)의 요소를 잠재울 수 있느냐는 것이 나의 오래된 질문이었다. 반세기 전, 영국의 작가 앤서니 버지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1962년 발표된 그의 책,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를 통해서 말이다.
"이제 어떻게 될까, 응?"어둠이 내려앉는 저녁이 되면,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은 아지트인 코로바 밀크바에 앉아 그날 밤에 무얼 할지 머리를 굴린다. 우유에다 벨로쳇, 신세메쉬 같은 '칼(마약의 속어)'을 섞어 마시면서 말이다. 약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하날님(God의 속어)과 성스러운 천사와 성자를 만나는 '정말 기분 째지는 15분'을 가지고 나면 비로소 '일'을 벌일 기분이 되곤 했다.
그들은 최신 유행에 따른 옷을 입고, 입가엔 미소를 띠우며 짐짓 신사처럼 길을 나선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벌이는 행동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쁜 쩐'을 긁어내기 위해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주무르거나', 상점에서 벌벌 떠는 주인에게 '초강력 폭력'을 휘둘러 현금계산대에서 돈을 들고 도망친다. 패거리 싸움에서는 그냥 발차기나 주먹질이 아니라 칼질, 체인질, 면도칼질 대결이 난무한다.
성폭행도 서슴지 않는다. 열 살도 안 된 소녀들을 겁탈하고, 남편 눈앞에서 돌아가며 유부녀를 강간한다. 절도, 마약, 폭력과 강간 등 이렇다 할 강력범죄는 죄다 등장하지만 그들은 유유히 수사망을 빠져나간다. 이쯤에서 예상했겠지만, 알렉스와 친구들은 범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로 범죄, 즉 악한 행동을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맘껏 누린다.
만일 인간이 착하다면 그건 지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난 그런 기쁨을 방해할 생각이 없어.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야. 물론 난 반대쪽을 더 두둔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악이란 있을 수가 없지. 무슨 말인가 하면 정부 놈들이나 재판관들 또는 학교의 접장들은 인간의 본 모습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을 용납할 수 없는 거야. 알렉스는 악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온전한 악인(惡人)이었다. 하지만 무리의 배신으로 교도소에 갇히고, '루도비코 치료'를 받으면서 알렉스는 변해간다. 악을 행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선을 행하는 착한 아이로 만들어진다.
루도비코 치료는 국가가 개발한 새로운 범죄자 교화 프로그램으로 알렉스는 시범 케이스로 선정돼 4주간 '치료'를 받게 된다. 치료라는 것은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잔혹한 범죄들이 득실대는 영화들을 보고 또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렉스는 폭력이란 끔찍한 것이라고 그의 신경과 세포 구석구석에 세뇌된다. 잠시라도 악한 생각과 행동을 하면 엄청난 육체적 괴로움이 동반되기에 알렉스는 본의 아니게 선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초강력 폭력을 휘두르면 샘솟던 짜릿한 흥분과 기쁨은 사라지고, 온몸을 찢어놓는 고통만이 남아 알렉스의 몸은 철저하게 길들여져 간다.
알렉스는 분명 변했다. 착한 사람, 선인으로 길들여졌다. 자극이 오면 파블로브의 개가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듯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착한 행동을 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알렉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치료가 끝난 후에도 누군가 시비를 걸면 잽싸게 면도칼을 꺼내 멱을 따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차게 예쁜 여자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올라오는 등 내면의 악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다만, 행동하지 못하게 됐을 뿐이다. 그는 생각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자유의지를 빼앗겼다. 그는 무력해졌다.
결국 작가 앤서니 버지스는 교도소 담당 신부의 입을 빌려 말한다. 강요된 선은 불행한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善)이 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저 애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저 자기 이익,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모독하는 괴이한 행동을 하게 된 거죠. 그게 진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쟤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신의 피조물도 더 이상은 아니지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처벌이 악을 뿌리 뽑을 수 있었나. <시계태엽 오렌지>는 말한다. 악행은 잠재울 수 있으나 악인 안에 자리한 악의 씨앗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의 자비로운 작가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내지만은 않는다. 알렉스의 미세한 심경변화를 통해서 악인의 교화 가능성, 선을 택하고 꿈꾸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살며시 보여준다.
4주간의 치료를 마치고 알렉스는 교도소를 퇴소한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꺾인 무기력한 삶은 그에게 고통을 주고, 결국 자살시도로 이어진다. 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루도비코 치료를 강요한 정부는 여론의 지탄을 받고, 알렉스를 다시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어쩐지 예전 같지 않다. 생기는 족족 마약으로 탕진하던 돈을 모으고 싶은 생각이 들고, 심지어 범죄가 아닌 정상적인 일을 해서 돈을 번다. 가정을 이뤄 아내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친구 녀석을 보고선 바보 같다 여기지만 마음 한 켠 왠지 모를 부러움이 일렁인다.
그는 예전의 상태로 다시금 '치료'됐지만, 무자비하게 폭력을 일삼던 열다섯 알렉스가 아니었다. 그는 국가나 사회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교화가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내면의 변화를 느리지만 천천히 겪게 된다.
마치 뭔가 부드러운 것이 내 속에 들어온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지. 그때에는 내가 뭘 원했는지 나도 모른다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난롯불이 타오르고 따뜻한 저녁이 차려진 곳의 옆방으로 들어가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는. 옆방에는 옹알거리는 내 아들이 누워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래. 여러분, 내 아들이야. 그때 난 몸속에 텅 빈 자리를 느꼈고 스스로도 놀랐어. 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거야. 형제 여러분, 철이 든다는 것이겠지. 또한 마침내 내일부터 아내가 될 여자를 찾아 나서겠다면서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중략).. 그리고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여러분은 갈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길이야. 내일도 향기로운 꽃이 피겠고, 더러운 세상이 돌아가겠고, 별과 달이 저 하늘에 떠 있을 거야. 자, 이제 여러분의 동무로부터 작별 인사를.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놈들에게는 커다란 야유를. 그러나 여러분들은 가끔씩 과거의 알렉스를 기억하라고. 아멘, 염병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