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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희호  시인 박희호가 2007년 두 번째 시집 <바람의 리허설>을 펴낸 뒤 5년 만에 세 번째 시집 <거리엔 지금 붉은 이슬이 탁본되고 있다>(화남)를 펴냈다
시인 박희호 시인 박희호가 2007년 두 번째 시집 <바람의 리허설>을 펴낸 뒤 5년 만에 세 번째 시집 <거리엔 지금 붉은 이슬이 탁본되고 있다>(화남)를 펴냈다 ⓒ 이종찬

거리엔 지금 붉은 이슬이 탁본되고 있다

어둠속에서 복제된 일렁임, 비틀거리는 시간과 그 사이 아우성을 앙칼진 고양이 발톱들이 주르륵주르륵 핏줄을 탐한다 저만큼 내달린 속도를 당기는 어눌한 혓바닥, 그 혓바닥 속에 봉인된 이슬이 습기를 흘린다

누구도 이 자리에서 표류할 수 없었다

팽팽한 맨발 경적은 바위같이 단단한 유모차 앞을 서성인다

서둘러 종영된 밤풍경 빗장을 채우는 동안
붉은 거푸집 사이로 이슬이 흐르고
완성되지 못한 긴 문장마다 내림굿을 받고 있다

어쩌랴, 푸석 푸석 삭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뼛속이 텅 빈 소牛
그 그림자에 시퍼런 칼날이 돋는 것을

폐허가 된 밤을 파먹고 있는
정지된 비명이
귓불이 얼얼토록 징을 치고 있다 - 26쪽, '촛불' 모두

시인 박희호가 2007년 두 번째 시집 <바람의 리허설>을 펴낸 뒤 5년 만에 세 번째 시집 <거리엔 지금 붉은 이슬이 탁본되고 있다>(화남)를 펴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삭막하고 쓸쓸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러 가지 삶에 시란 그물을 활짝 펼친다. 그 그물 속에서 야생 그대로인 삶을 건져 올려 참살이 화두로 삼는다. 

이 시집은 모두 4부에 64편에 이르는 시가 이 세상과 싸우다 진 것들, 이 세상에서 밀려난 것들,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것들, 이 세상에서 슬픈 것들을 한껏 아우르며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까지 꼬옥 껴안고 있다. 빛나는 희망 속에서 캄캄한 절망을 줍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빛나는 희망을 줍는다는 그 말이다. 

'고구마를 캐다', '거미', '촛불', '붕어빵', '시장 안에 골목길이 있다', '돼지머리', '문고리엔 指紋(지문)이 있다', '맛조개', '꽁치의 이력', '병상일지 6~7', '밤새 산이 입적하다', '그를 표절할 수 없다', '골목에 대한 서정', '난시', '갈대와 모의를 시작하다', '낙엽에 쓴 편지', '바위에 대한 그리움', '몰락하는 강', '무정란의 강', '익사한 기도' 등이 그 시편들.

시인 박희호는 '시인의 말'에서 "우여곡절 끝에 마룻대에 서까래를 걸었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휑한 뜰, 눅눅한 한기서린 알전구 아래서 그저 넉넉하게 읽히는 언어를 나름 엮으리라 했건만 푸른 별빛 가득 머금고 만삭이 된 항아리에서 퍼 올릴 수 없었던 시어, 그 앞에서 마냥 주눅이 들고 만다"고 엄살을 떤다. 그도 그럴 것이 "늘 낯선 길에서 또는 현장에서 분노가 서술되지 못하는 몸 상태가 사뭇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콩깍지 낀 것 같은 이 세상 속살 찾는 시

필사적으로 갯벌을 가래질하며
겉으로는 그토록 강한 척, 평생 직립보행을 거부한
참게가 밥상 위에 있다

그 게딱지를 뜯어내자
품어 안은 속살
그래, 저 여린 속살을 감추려고
무던히 등짝에 겹겹 옹이를 박았구나 - 14쪽 '참게' 몇 토막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몹시 어지럽다. 무엇 하나 제 모습 그대로 갖춘 것이 없다.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면 왼쪽으로 가라 하고, 왼쪽으로 가려 하면 오른쪽으로 가라 하는 세상이다. 시인은 "평생 직립보행을 거부한" 밥상 위에 오른 참게, "스스로 제 속을 열어 보인 적 없는" 그 게딱지 속에서 "호도처럼 주름진 / 아버지 이마"를 본다.

"호도처럼 주름진" 그 속살(원형)에서 "어머니 뱃살"을 본다. 그 "순간, 증류되지 않은 / 짠 내음 속으로 / 경건한 세월"이 비틀거린다. "목울대까지 부푼 슬픔 / 그 슬픔을 대신 우러주려고 / 한 음절 파도가 팽팽한 포물선"을 그린다. 시인은 이 세상은 게딱지 같은 것이며, 그 게딱지를 뜯어내야 속살(참살이)을 볼 수 있다고 여긴다.

박희호 시인이 콩깍지가 낀 것 같은 이 세상 속살을 찾는 시는 이 시집 곳곳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날마다 상처를 건너는 것은 지붕을 끌어내려 땅에 심는 일"(거미)이나 "누군가 깊은 상처를 내고 우듬지로 향하는 물길을 돌려놓았다"(고로쇠나무), "산은 그렇게 밤새 하얀 수의를 걸친 채 / 입관되었다"(밤새 산이 입적하다) 등이 그러하다.     

"헐렁하게 채워진 단추 속 / 그 속에선 먹다 남은 잡채처럼 쉰내가 비틀거린다 / 언제나 몸에 딱 맞는 옷을 걸치고 / 허상이 지천인 / 도시를 헤매며 잠사도 타협을 용인하지 못한 나 / 나는 저 사내를 읽어낼 수도 / 표절할 수도 없다" -74쪽, '그를 표절할 수 없다' 몇 토막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난시'

시인 박희호 세 번째 시집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쓸쓸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러 가지 삶에 시란 그물을 활짝 펼친다.
시인 박희호 세 번째 시집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쓸쓸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러 가지 삶에 시란 그물을 활짝 펼친다. ⓒ 화남
단 한 점 흔적도 볼 수 없다
흔적을 볼 수 없으므로 무늬 또한 볼 수 없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도 볼 수 없다
그럼 당연히 자막도 볼 수 없을 것이나
스크린에 빼곡한 소리를 듣고 만질 수 있다

나는 시력이 나빠 유령처럼 흰 것만 인식할 수 있다 -90쪽, '난시' 몇 토막

시인이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까닭은 "세상이 너무 어두워 / 어둠에 익숙한 내 눈이 퇴화"(난시)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난시가 되었지만 "시력은 환하다 /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염없이 하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환한 시력은 "이 아득한 세상 봄이 꽃을 피우지 못하듯 / 쉼 없이 부글거리는 보수와 수구들의 합창"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시인은 "그들이 건재하는 한 / 조국이 통일되지 않는 한 / 이 땅에서 미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 비정규직이 없어지지 않는 한 / 재벌의 노동자 수탈이 자행되는 한" 여름이 되면 그늘이 퇴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고 못 박는다. 그늘이 퇴화된 그 뜨거운 여름이 이어지는 한 "이글거리는 스크린 복사열로 나 또한 숯이 되리니" 어찌 퇴화된 망막이 복원될 수 있겠는가.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시인 스스로 시력이 떨어져 '난시'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흐름이 통제된 무정란의 강이 / 쇠백로 다리에 비스듬히 걸려"(무정란의 강) 있는 것이나 "담보도 없이 시행되는 하루 한나절에 내몰리는 잠에 대한 입찰"(쪽방), "파닥이는 지느러미에 실려 기도가 떠내려간다"(익사한 기도) 등도 이 세상 난시 때문이다.

"오늘도 봉분 속으로 실종된 자선가 꿈, 그 꿈의 날개에 균열이 생기고 / 주머니에 마지막 남은 동전 노숙자 손에 쥐어주자 / 푸드득 빼곡한 하얀 숫자가 중력을 잃고 / 꾸역꾸역 변명만을 게워 내고 있다 // 필사적으로 움켜쥔 사내의 사타구니 / 무상으로 들어앉은 빳빳한 꿈만 / 내일을 충전시키고 있다" -122~123쪽, '백수의 꿈' 몇 토막  

삼라만상에 샛노랗게 결박당한 채 떠 있는 초승달 같은 시편들

"강변 나뭇가지마다 영근 촉수는 / 눈꺼풀이 풀리고 / 자갈 구르는 외침엔 이끼가 누렇다 // 물이 매만져 놓은 꽃술은 흙먼지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 기지개 켜는 넝쿨은 걷혀 하얗게 줄기를 빗질한다 / 잔바람에 쑥쑥 자란 강의 맥박 / 표본처리 된 곤충이 되었다" -120쪽, '몰락하는 강' 몇 토막 

시인 박희호 세 번째 시집 <거리엔 지금 붉은 이슬이 탁본되고 있다>는 삼라만상이나 사람살이 그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어긋난 세상을 탁본하는 눈이다. 시인은 그 탁본을 뜬 우물처럼 깊숙한 눈으로 삼라만상과 사람살이에 또 한번 탁본을 하며 이 세상이 지닌 뿌리를 찾아낸다. 그 뿌리가 곧 시요, 참살이이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답답하다. 뭐하나 제대로 이뤄진 것 없는 우리 현실에 이 땅의 흙과 산과 바다와 바람, 그리고 추억마저도 답답하다"며 "이런 처연한 현실과 삼라만상에 샛노랗게 결박당한 채 떠 있는 초승달 같은 시편들. 30여년 시를 써오면서 아직도 혁명과 민족의 순정성을 놓지 않고 있는 아마추어 리얼리즘이 민족의 정한과 울분을 희고도 짜디짠 소금꽃으로 피워 올리고 있다"고 적었다.

문학평론가 임우기는 발문 '야성의 시 정신을 기다리며'에서 "시인 박희호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 정신은 특유의 '치열한 삶의 시'에서 발견된다"며 "도시의 삭막한 삶과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시를 향한 치열한 삶의 정신과 그 정신적 모색이 거둔 깊이 있는 수확이라 할 만한 것"이라고 썼다.

문학평론가 김춘식(동국대 교수)은 해설 '패배한 것들, 약한 것들, 상처 입은 것들, 슬픈 것들'에서 "박희호 시인의 특징은 '생의 이력'을 외부의 사물에 투사하여 바라보는 시선에서 주로 발견된다"며 "어쩌면 그저 평범한 사물이거나 장면이지만 시인에게 그 대상들은 모두 어떤 기억 혹은 삶의 내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연상된다"고 평가했다.

시인 박희호는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나 인하대,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8년 동인지 <시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81년 첫 시집 <그늘>, 2007년 두 번째 시집 <바람의 리허설>을 펴냈다. 지금 한국작가회의 회원과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 <분단과 통일시> 동인, 일간문예뉴스 <문학in> 주필을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거리엔 지금 붉은 이슬이 탁본되고 있다

박희호 지음, 화남출판사(2012)


#시인 박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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