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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느낌이 지금까지 생생해서 평생 잊기 어려운 감격스런 장면 중 하나가 될 듯 싶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조기교육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나는 초등학교 - 당시엔 국민학교라고 불렸다 - 입학 전에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유아시절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어머니가 손을 짚어가며 읽어주시던 성경과 찬송가를 눈대중으로 대충 가늠해보기는 했지만 한글을 내 손으로 쓰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 제대로 읽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 첫 날 식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담임선생님은 커다란 칠판에 한글 자모를 순서대로 적은 다음 이를 조합해서 만든 간단하고 쉬운 단어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 때 칠판 앞 선생님의 모습을 마치 주술에 홀린 듯이 바라보던 나에게 찾아 온 그 특별한 느낌! 생경하면서도 머리에 전깃불이 켜지듯 번쩍하는, 알 듯 말 듯한 희열이었다. "아, 드디어 나도 직접 내 눈으로 글을 읽고 , 또 쓸 수 도 있겠구나!"

'나도 이제 글씨 쓸 수 있게 됐구나!' 어린시절 가슴벅찬 감격이 아직도 생생

그때부터 내 개인사에 있어 이른바 문자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장엄하게(?) 열린 것이다. 인간이 역사속에서 성취한 문명의 기기와 문화적 양식이 사람에게 미치는 강력한 파장의 사례를 우리는 쉽게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의 자력만큼 인간의 삶에 깊숙한 각인을 만드는 거대한 힘이 또 있을까?

문자언어가 없다면 역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경전이 없었다면 인간의 종교적 심성은 고등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문자가 매개체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후세에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삶을 구분하는 잣대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기준은 문자를 알기 이전 유아기와 문자를 터득한 이후 시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문자기록물에 대한 이해심화 그리고 문자의 효율적 사용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한 일은 결국 문자로 형상화하는 논리의 개발과 적용이었다. 문자사용의 능숙성은 말의 표현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결국 '말놀이' 또는 '말장난'이 삶을 구성하는 메인보드 (main board) 인 셈이다.

문자를 깨치며 접하게 된 수많은 책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로부터 받은 그 충만한 느낌과 해일처럼 밀려오는 감동,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신새벽의 벅찬 전율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평생의 모토로 삼은 단어가 있다면 '논리'가 아닐까 싶다. 내 감정과 지식을 논리정연한 언어로 풀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그 어떤 감정과 생각도 감추지 않고 반드시 언어의 형태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최근 들어, 확고했던 내 인식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평생을 지탱해왔던 '언어와 논리' ,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우리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을 넘어선 그 어떤 경지가 사람을 진정 사람되게 하고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l 아닐까 하는 생각...

언어로 다 메워지지 않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 어찌 해야하나?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서 말이 더 많아졌다. 특히 미국땅에서 살다보니 아이들을 더 실력있고 반듯하게 키워야한다는 강박감이 가중됐고 이는 아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잔소리로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퍼부어대지만 아이들의 반응에서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한가지, 말로 하는 훈계는 별로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일갈했듯 '모든 잔소리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무용성을 실감한다는 것은 내겐 사실 큰 고통이었고 좌절이었다. 존재감의 상실에 맞먹는 아픔이었다.

내 언어의 한계는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그리고 실제 교육에 도움이 되는 건 반복되는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 내 몸으로 보여주는 구체적 삶이라는 뼈아픈 각성으로의 연결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 사실 그렇지. 말을 듣는대로 바로 깨달음이 오고 행동이 바뀐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언어의 세계에 갇혀버린, 옹색하고 고집스런 중년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힘들지만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휴 ~

미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루빈스타인이 말년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연주 시작 초반 잠깐 가볍게 팔을 흔들며 예의 지휘를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손동작을 멈춰버린다. 지휘는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바라만 보고 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지휘자는 쉬고(?) 있지만 연주는 계속된다. 그러나 카메라가 지휘자 루빈스타인의 얼굴을 비추면서 오래지 않아 의문은 풀리게된다.

루빈스타인은 간간이 얼굴을 돌려 흐뭇하게 단원들을 바라보고 화음을 음미하면서 얼굴표정으로 지휘를 하는 것이었다. 때론 눈짓으로, 때론 눈썹의 움직임으로 단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천변만화의 얼굴 표정으로 단원들과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었다.

아, 그 벅찬 감동 잊을 수가 없다. 강력한 충격처럼 온 몸을 휘감는 그 전율에 떨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클래식 스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또한 말년에 의자에 앉아 극도로 절제된 손의 동작만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우리는 흔히 지휘자의 화려한 팔과 손동작, 격정적인 몸의 제스처에 환호한다. 또한 우리는 유려한 연설에 감동을 받고 갈채를 보낸다. 눈에 잘 보이고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 '유형의 세계'가 전부인 듯 생각하며 산다.

말로 또는 글로 표현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는 언어적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통달을 넘어 도달하게 되는 '침묵과 금언의 경지'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세상이 아닐까?

화려한 제스처를 넘어선 무동작의 지휘는 음악의 진수를 경험한 최고반열에 오른 고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언어의 유용성 견지하되 그 안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

인간과 인간사이의 간극을 메워주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매우 유용하지만 때론 번다한 형식만 남아 있을 뿐 인간의 따듯한 온기는 사라져버린 것이 언어 뿐일까? 우리가매일 매일 일상에서 주고받는 사회적 예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한비는 그의 저서 한비자에서 "예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며, 모든 의로움을 꾸미는 것"이라 정의한 뒤 "예를 번다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마음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예절은 소박해야한다는 한비의 통찰력에 비춰볼 때 언어의 홍수, 겉치레 뿐인 예절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간략하게 언어와 나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삶의 방향계를 재점검해야겠다. 

나는 언제쯤 그 지겨운 말의 향연을 끝내고 말의 감옥에서 탈출할 것인가? 언어의 유용성을 포기하지 않되 말 없이도 대화할 수 있고 얼굴 표정과 자세, 세세한 몸의 실루엣만으로도 감동과 편안함을 주는 그 날이 내게 올 것인가?

지천명의 나이에 내 존재를 향해 던지는 질문들이다. 


#언어#말의 감옥#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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