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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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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원광대학교에서 있었던 강사연수를 받고 왔다. 오랫만에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3년 만에 개최하였던 개인전(제 5회 묵향으로 열어가는 사랑의 세상) 분석을 스스로 마인드로 해보았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재미있는 일과 뜻밖인 일들과 앞으로 좀 생각을 달리 해보아야 할 일들이 생겼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재미있는 일은 고마움이란 작품은 오프닝때 경상도 분에게 팔렸는데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마움이란 고마움이란 아이가 있는 보은에서 온 젊은 내외분이 간곡히 사고 싶다고 해서 경상도에 연락해서 양보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뜻 밖의 일은 초대장을 300장 가량  부치고 미리 오겠다고 카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연락을 해 온 분들이 의외로 바쁜 일이 생겨 실제로 온 경우는 십분지 일 정도였다. 오히려  초대장과 관계없이 그냥 알음알이의 연줄로, 또는 운좋게 충청지역의 두 일간지 기자들이 와서 보고, 마음이 동했는지 그 다음날로 바로 크게 보도해준 신문기사를 우연히 보고 온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전시장 위치가 시내 한 가운데라 지나가다가, 또는 한 번 온 분들이 다른 분들을 데리고 온 경우가 더 많았다. 부끄러웠던 어떤 일은 올해 한 번도 내가 방문해 주지 못한 곳인데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단체로 다녀가기도 하고, 어떤 한국화가는 자기가 강의하는 교육생들을 데리고 오거나 매일 전시장에 출근하듯이 오는 분도 있었다.

전시기간 동안 700명 가량 다녀가고 내방객에게 한 장씩 무료로 주는 내년 달력이 천 부 정도 나갔다. 의도적인 초청에 따라 의례적으로 온 것보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꽃을 피우듯 자연스럽고 우연스럽게 온 경우와 다른 지방의 작가들이 많았던 것은 나도 뜻밖이었다. 15년 전에 한 첫 개인전때만 해도 전시장을 온 사람들은 거의가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장 작품철거를 하루 앞둔 날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몇 명 밖에 보지 못했다. 내가 직장인이라 점심시간에만 잠깐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온 지인들이 밥을 사준다고 해도 식당에 가지 못했다. 멀리서 온 분들이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제일 반가웠던 손님은 초등학교때 서예를 배웠던 꼬맹이가 대학졸업반이 되어서 곧 있으면 캐나다로 떠난다고 찾아 온 것과 중등교사 시절 내게 서예를 잠시 배웠지만 지금은  장학사가 된 내외분이었다. 나와 동갑내기 그녀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녀의 아이들과 내 아이들도 같은 학교 친구로 지내었다. 그녀의 아이들인 자매는 초등학교 졸업할때까지 배웠고, 그녀 또한 같은 중학교 선생들과 그룹을 짜서 배우러 왔다.

그러다 나는 삶의 가파른 협곡을 타면서 새로운 단체를 만드느라 많은 지인들과 절로 소식이 격조해졌다. 사실 비영리민간단체일을 시작하고 유지를 하려니 사방에 후원금을 모아야 했던 일들이 쉽지 않았다. 후원호프나 바자회 등을 열면 처음에는 흔쾌히 손을 잡다가도 사람사는 일이 모두 다 사정이 있는 터이라 부담을 느꼈을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터이었다.

십 여년 전의 그 친구가 우연히 내 전시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전시장에 왔고 작품도 한 점 사갔다. 그리고 어떤 할머니는  내게 잠깐 밖에 배우지 않았는데 소식이 끊겼다가 시내에 볼일 보러 나와 플래카드를 보고 전시장에 와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오래 전에 알던 사람들의 가슴에 따스한 정으로 기억되면 그것이 마치 몸에 좋은 효소처럼 마음에 발효작용을 일으켜 뭉클하게 만드는 것일까.

잘 알지 못하지만 여러가지 경로로 내 팬을 자처한 멀리서 온 수화를 많이 사용하던 그녀는 김수환 추기경의 명상록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지 전시장을 한창 빙빙 돌다가 갔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와서 매월 조금씩 나누어 낼테니 그래도 작품을 살 수 있느냐고 조심히 물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식당에 데리고 가서 따스한 국물을 나눠먹으며 그녀의 일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조금이라도 같이 밥먹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그녀에게 각별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나도 한때 배고픈 이십대에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가서 반 지하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즈음 인사동에 누군가를 찾아 갔을때 사람을 문 옆에 세워두고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던 사람들보다 밥과 시간을 나누어 따스히 웃어주는 것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북경에 유학을 떠난 옛제자도 북경에 있는 줄 알았는데 철거를 하루 앞둔 날 갑자기 도자기작가를 데리고 방문을 했다. 무심코 언제 다시 북경으로 떠나느냐고 하니 며칠 후에 떠난다고 했다. 무심코 다음 날 철거하니 시간이 되면 전시장에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찾아왔다. 태권과 유도와 검도를 합하면 36단이 되는 고수라서 무거운 물건도 기를 이용해서 산뜻하게 운반하기에 3명의 일꾼역할이 거뜬하다. 연구실 이사할 때도 돈을 주고 산 이사짐센터 인부들보다 진작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 제자였다. 

쌈짓돈을 모아서 어머니를 사간 노점상아저씨가 철거하는 날 작품을 가지러 왔다가 전시장의 모든 작품 포장을 몇 시간 동안 해주고 가고 대구에 사는 아가씨는 고속전철을 타고 자기 작품들을 직접 가지러 왔다. 아마도 몸도 귀도 좋지 않은 내가 작품을 운송하는 것이 염려되었나 보다. 오랫만에 만난 장학사도 그리고 노조일도 하며 야근도 하고 김밥장사도 했던 아줌마도, 시인과 음악가도 모두 직접 가지러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비단은 오백년 가지만 천 년 이상을 간다는 우리 한지로만 작품들을 제작했다. 한지가 무척 비싸서 종이값만 오십 만 가량 들었지만 그 실험적인 작업은 무척 즐거웠다. 한지를 자르고 붙이고 염색도 하여 마치 모시와 삼베같은 느낌과 달빛받은 밤 창호지 맛도 내게 하거나 단풍잎 같은 느낌이 들게 한 것을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전시장에 내놓았던 작품들 중에 정말 심혈을 기울여  색다르게 다양한 서체와 특이한 구도로 제작 했던 서예술적인 어려운 작품들은 별로 팔리지 않았다. 가족사랑, 동반, 상생, 이해, 부모은중경, 어머니, 산, 일치, 꽃잎, 자연, 정, 등 소박한 행복에 대한 작품들은 거의가 다 팔렸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의외의 일은 한창 MBC파업이 한창일 때 광주항쟁과 연결시켜 글을 직접 지어 약간은 거칠고 투박한 맛이 나는 글씨로 제작한 늘꽃이란 작품도 아무도 사가지도 않았고 MBC파업에 함께 했던 방송국 사람도 내 작품이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전시장의 그 작품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 작품을 제작할 때 나는 의미를 시사하는 그림을 넣을 것인지 고민을 좀 했지만. 이 작품은 광주로 보내던지 아니면 어려운 노조운동을 하는 어떤 비영리기관에 기증형식으로 주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다양해지고 첨단문명의 시대라서 특별한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특별한 것보다 평범하지만 최선의 것과 자연스러운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느꼈다. 양반글씨로 알려진 서예가 좀 더 대중친화적이 되고 생활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반기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6년 전에 충북대병원로비에서 전시를 했을때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음이나 행복과 건강에 대한 글귀앞에서 한참 머무른 것을 보고 작가로서 내가 표현해야 하는 희망과 상생에 대해 절실히 느꼈던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도 앞으로 내가 표현하고 지향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다시 짚어보게 되었다.


태그:#전시철거하는 날, #서예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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