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동해조선소에 입사하니용지를 주고 글을 쓰라고 했다.이력서에는 중학교 나왔다고 썼는데글을 몰라 앞이 캄캄하다.힘들고 어려운 세월 보내고굳은살 박힌 손에 연필 쥐고'ㄱ, ㄴ', '아, 야' '가, 나, 다'안개 걷히고 글자가얼굴을 쏘옥 내민다.오늘도 연필 쥔 손에 힘주며글자의 바다에 빠졌다.비문해자(옛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문해교육기관인 울산푸른학교에 다니는 서영식씨의 시화 '글자의 바다' 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는 최근 한글을 공부하면서 세상사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직접 시를 짓고 크레파스로 손수 그림을 그려 '문해학습 시화전 및 수기 발표대회'에서 울산광역시교육감상인 버금상을 받았다.
가을이 오면세상은 온통저마다의 색으로 물이 들지요누군가 시키지 않아도스스로를 뽐내듯알록달록 물이 들지요겨울이 오기 전자기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기억해 달라는 듯이그렇게 알록달록스스로를 물들입니다문해교육기관 울산시민학교에 다니는 66세 김순이씨가 지은 '가을'이라는 시다. 한글을 배우기 전 시를 접해본 적이 없던 그가 이제는 어엿하게 시인 빰치는 작품을 냈다. 김순이씨는 이 대회에서 으뜸상인 울산광역시장상을 받았다.
'2012 문해학습 시화전 및 수기 발표대회'가 열린 지난 8일 울산 남구 옥동 울산가족센터 대연회장. 이곳은 시를 읽는 지은이나 듣는 방청객이나 눈물을 흘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그야말로 눈물 바다를 이뤘다.
평생 글을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을 이제야 풀고 있는 이들이 직접 지은 시를 낭독할 때 대회장 내에서는 여기저기 울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작품을 낭독하는 본인들도 울먹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과 울산문해교육기관연합회가 공동 주관한 이날 대회는 제566돌 한글날을 기념해 비문해자들이 그동안 문해교육기관에서 갈고 닦은 글솜씨를 뽐내는 자리였다. 짧게는 1년, 길게는 수 년을 공부해온 이들이다.
이날 대회에는 울산지역 문해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50~60대 학생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의 작품인 시화와 시 75편, 수기 20편이 출품됐다. 가르치는 교사들의 실천사례 10편도 소개됐다.
수기에서 슬기로운상을 받은 박수정(베트남명 보티튀뒤엔)씨는 한국으로 시집온 지 3년차 주부로서의 생활상을 담담히 밝혔다. 그는 "한글을 몰라 책을 읽고 싶어도 못읽고, 출발지와 도착지를 읽을 줄 몰라 버스도 무서워서 타지 못했다"며 "한글을 배우니 공부가 점점 재미 있어지고, 더 배워 우리 아기한테 동화책도 읽어주고 싶다"고 수기에서 적었다.
울산생명의전화 교사인 허영철씨는 실천사례에서 "여기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물나는 어린시절과 설움 많은 젊은 시절을 이겨내고 용기 있게 배우러 온다"며 "늦은 나이에 물어물어 찾아서 배우러 온다는 게 쉬운일이 아닌데,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울산문해교육기관연합회 김동영 회장은 "성인문해교육은 국가가 최우선으로 지원하여야 할 평생교육의 영역"이라며 "그동안 정부가 어려웠던 문해교육현장에 지원과 육성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소외계층이 있고 문해교육 현장 또한 어려움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문해학습자들은 공부할 시기에 학교를 가고 싶어도 일터로 향해야 했고, 자신보다 먼저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며 "이제나마 글자를 통해 세상을 읽고 글로 자신을 기록하는 보람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고 소개했다.
산업역군, 조국근대화... 우리나라 비문해자 600만 명 울산문해교육기관연합회와 전국야학협의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비문해자는 6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2002년 20세 이상 성인 3000명을 샘플링 조사한 결과 6학년 수준의 읽기, 쓰기, 셈하기가 전혀 불가능한 '완전 비문해자'가 8.4%에 달했다. 또한 2005년 인구총조사에서 우리나라 전체 15세 이상 인구 3800여만 명 중에서 초등학교 교육(5.45%)과 중학교 교육(10.29)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599만여 명(15.74%)에 달했다.
대부분 50대~70대인 이들은 70~80년대 산업역군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큰 누이로서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군사독재시절 산업역군 또는 경제개발의 파수꾼으로 불린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 결국은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김동영 회장은 "한글을 몰라 은행에 가지 못하는 50~60대 여성들이 공부를 한 후 뜻뜻하게 은행 창구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할 때, 한글을 배운 후 운전면허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한 후 부둥켜 안고 우는 여성을 볼 때 무척이나 흐뭇했다"며 "지금 대선 후보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 하는데, 조국근대화를 이유로 글을 못배운 이런 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경제민주화가 아니겠나"고 말했다.
한편 이번 대회에 출품한 문해교육 기관 학생들은 오는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열리는 울산평생학습축제에 작품을 다시 출품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박석철 기자는 2012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선특별취재팀입니다.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