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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3국에서 인터넷을 통한 한류문화의 파급이 자금까지는 가랑비에 옷 젖듯 학생과 마니아층을 통해서 슬그머니 이루어졌다면, '강남스타일'을 계기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 빌뉴스, 카우나스, 리가, 탈린 같은 발트3국의 주요 대도시에서 강남스타일의 멜로디에 맞추어 춤을 추는 군중들과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국문화의 폭넓은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류를 단순히 '일본문화'의 아류로 파악하거나 단순히 '재미있는 아시아 문화'의 단면으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럼 점에서 지난 주말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양국 도시에서 진행된 행사는 더 의미가 있었다.

이전과 다른 모습 보여준 '한국문화특별주간행사'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에서는 지난17일부터 21일까지 한국문화의 다양한 면을 소개하는 한국문화특별주간행사가 열렸다. 한국의 전통문화, 영화, 한국인의 일상을 담은 사진전, 그리고 에스토니아와 한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학술대회 등 다채로운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에스토니아에서 오랫동안 연구생활을 해온 부산대 독어교육과 이상금 교수와 타르투 대학교 주최로 진행됐다. 이번 행사에는 부산영화제조직위, 한국문학번역원, 에스토니아를 관할하고 있는 주 핀란드 한국대사관, 그리고 인천에서 활동하는 국악단체인 '서도소리' 등 여러 단체가 참여해 이전 한국관련행사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배뱅이굿 공연이 열린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의 상징, '키스하는 학생상'
 배뱅이굿 공연이 열린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의 상징, '키스하는 학생상'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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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기획과 진행을 담당한 이상금 교수는 "이번 행사를 통해서 한국의 현재, 과거,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전통음악을 통해서는 과거의 모습을, 사진전과 영화를 통해서는 현재 한국인들의 삶을, 그리고 학술대회를 통해서는 에스토니아와 같이 일구어갈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영화는 최신흥행작보다는 한국인들의 고민과 현실을 잘 보여주는 독립영화들이 선정돼 상영됐다. <계몽영화>,<혜화,동>,<밍크코트> 세 작품이 선보였는데 상영관에는 관객들이 자리를 꽉 채워 한국영화에 대한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사실 에스토니아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 이외에는 한국의 다른 독립영화를 만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타르투 시민들의 관심을 끈 것은 서도소리 공연이었다. 서도소리는 황해도, 평안도 등 한반도의 북서부 지역에서 불리던 민요들로 한국 민요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가사와 차별화된 창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노래가 불리던 서도지역에서는 정작 북한의 정치적 색채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의 금지돼, 그 명맥은 인천에서 활동하는 민요단 서도소리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타르투에 찾아온 '배뱅이굿'

이번 공연에서 서도소리는 단지 서도지방의 민요만이 아니라, 한국의 다양한 무용과 민요, 산조 등을 선보여 에스토니아 관객들에게 색다른 감성을 선사했다.

특히 서도소리의 대표적인 서사민요인 배뱅이굿 완창무대는 눈길을 끌었다. 아흔을 넘긴 이은관 명창을 대신해 수제자 박준영 선생이 참가했다.

"왔구나~ 배뱅이가 왔구나~!"라는 가사로 유명한 배뱅이굿은 이루어질 수 없는 계급간 사랑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비판, 풍자가 가득 담긴 이야기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혼인을 앞둔 처녀 배뱅이가 한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 후 상사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딸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부모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 위해 전국의 무당들을 모으고, 이미 막걸리집 주모를 통해서 배뱅이의 사정을 아는 건달이 무당인 척하고 굿판에 들어와 배뱅이의 혼령이 들어왔다고 연기하여 사람들을 속여 돈을 가져간다는 내용이다.

배뱅이굿은 미국, 캐나다, 호주, 중국 등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가진 적이 있지만 유럽에서의 공연은 독일에 이어 에스토니아가 두 번째다. 이번 에스토니아 공연에서는 시간 관계상 완창대신 한 시간으로 줄여서 공연이 진행됐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현지인들을 위해서 에스토니아어 자막이 사용되었다.

타르투 대학교 역사 박물관에서 배뱅이굿을 열창하는 박준영 선생.
 타르투 대학교 역사 박물관에서 배뱅이굿을 열창하는 박준영 선생.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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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주간의 처음을 연 배뱅이굿 완창무대는 애석하게도 같은 시간에 한국영화제가 열려 많은 관객이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민속학 연구가 두드러진 타르투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민속음악연구자들과 유명 현대음악가들이 참석해 이 행사 자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에스토니아 민속음악계에서 잘 알려진 릴리안 랑그세프씨는 공연이 끝나자 "줄거리와 묘사가 너무 훌륭하고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으며, 특히 노래를 부른 박준영 선생님의 연기에 찬사를 보낸다"고 극찬했다. 공연을 본 30여명의 관객들은 신들린 듯한 배뱅이굿 완창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배뱅이굿에 대한 인지도는 한국에서도 점차 떨어져 가고 있다. 실지로 스승인 이은관 선생께서 정동극장에서 배뱅이굿 완창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땐 관객이 단 5명 뿐이었다. 그러나 이은관 선생은 관객수에도 아랑곳 않고 언제나처럼 성심을 다해 완창을 마쳤고, 그때 보았던 스승님의 모습이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공연을 마치고 박준영 선생이 비밀처럼 털어놓은 그 얘기는 그가 가진 배뱅이굿에 대한 애정과 열성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열정이 에스토니아 같은 작은 나라의 관객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 전해졌다.

한국의 판소리, 커튼콜 다섯차례 받아  

리투아니아 중심부에 위치한 아닉스체이는 인구가 몇 만 명에 불과하지만 리투아니아에 가지고 있는 지명도나 인지도는 한국의 전주나 통영쯤 된다.

울창한 숲으로 유명한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리투아니아의 문화사를 이끈 문학가와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특히 이 도시는 올해 리투아니아의 문화수도로 선정되어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중 백미는 16일에서 20일까지 열렸던 국제연극제. 행사의 마지막날 열린 공연에는 한국의 판소리 이수자인 박인혜씨가 참가해 관심을 모았다.

아닉스체이 국제연극축제에서 공연하는 박인혜 소리꾼
 아닉스체이 국제연극축제에서 공연하는 박인혜 소리꾼
ⓒ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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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혜 소리꾼은 신세대 국악인으로, 올해 8월 서울 문예창작촌에서 열린 리투아니아 시낭송회에 초대 받아 공연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이번 국제연극제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박인혜씨의 참여는 한국에서 승려로 활동하고 있는 리투아니아 출신 보행 스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보행 스님은 행사가 열리는 아닉스체이에서 대도시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공연 시작 이전에 끊기자, 박인혜 소리꾼 공연에 한명이라도 더 많은 한국인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직접 차량을 수배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공연 내내 자막이 사용되었던 에스토니아와는 달리 이날 공연에서는 박인혜씨가 심청가의 한 대목을 보행 스님과 공동으로 보여줬고, 아닉스체이 출신의 위대한 시인 '안타나스 바라나우스카스'가 지은 시 '아닉스체이의 숲' 내용을 한국 판소리로 편곡한 곡을 함께 초연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계속된 박수로 인해 커튼콜을 무려 다섯 번이나 해야했다.

박인혜 소리꾼은 "처음 리투아니아 시를 판소리로 편곡하자는 제안을 받고 그러한 시도가 가능할까 적잖은 의구심이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리투아니아어에서 한국어로 옮긴 시를 몇 번이나 숙고하면서 읽고 판소리에 맞게 번안하는 과정에서, 시인과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숲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래와 서사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판소리의 특성을 리투아니아 관객들에게 더 잘 선사하기 위해 박인혜씨는 도입부에 등장하는 아니리를 일부러 리투아니아어로 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 탓일까? 바라나우스카스가 숲에 빗대어 노래한 리투아니아의 아픈 역사가 판소리의 창으로 울려퍼질 때, 몇몇 관객은 슬픔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공연의 성공 뒤에는 소리꾼의 남다른 노력 뿐 아니라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아픈 역사에 대한 대목을 흐느끼듯 노래하는 박인혜씨
 리투아니아의 아픈 역사에 대한 대목을 흐느끼듯 노래하는 박인혜씨
ⓒ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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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후 저명한 연극연출가가 한분 찾아오셨다. 서울에서도 몇 번 공연을 하신 분이었는데, 나에게 찾아와 엄청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시 마지막에 '안타나스 바라나우스카스' 시인은 마치 예언처럼 '언젠가 노래꾼 한명이 멀리에서 찾아와 내 시를 다시 노래할 것이라'라고 썼는데, 그 시인의 예언이 바로 오늘 이루어졌다면서 그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설명해주셨다."

사람들은 리투아니아가 가장 어려운 시절에 살았던 유명한 시인이 남긴 예언을 박인혜씨의 판소리 속에서 찾아내어 오열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고 가졌던 관객과의 대화자리에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박인혜씨는 리투아니아에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짧은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국의 다른 모습 보여준 두 공연

많은 사람이 찾아올 수 없는 작은 도시에서 열린 공연이었지만, 배뱅이굿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창조적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판소리는 마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감동을 주었다. 한국의 아이돌과 트렌드 드라마 외에 다른 것들을 접할 수 없었던 이곳 사람들에게 또다른 한국문화의 영향력을 보여준 셈이다. 

황천길로 떠난 것 같던 배뱅이가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찾아와 그들의 심금을 울리고, 전혀 알아들을 것 같지 않는 한국노래가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기적을 만든 올해 가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태그:#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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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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