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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의 가을 풍경
 길상사의 가을 풍경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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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테마여행 회원들과 함께 제54차 서울 문화유산 답사를 했다. 이번 답사 대상은 성북동. 성북동에는 문화유산만 있는 게 아니다. 절(寺)도 있고, 원(園)도 있고, 공연장도 있다. 그리고 문학·예술인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마침 간송미술관 가을 전시회가 있어 문화유산 답사뿐만 아니라 그림 감상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에서 만나 성북동의 가운데를 서북방향으로 관통하는 성북로를 따라 삼청각까지 걸어가면서 문화유산을 답사할 예정이다. 그 사이에 있는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돈암장·최순우 옛집·선잠단지·성락원·길상사·이종석 별장·이태준 가옥·심우장이 있다. 돈암장은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2년 간 거처하던 집이고, 성락원은 의친왕 이강(李堈)이 35년 간 살던 별궁이다. 그리고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 이후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 흉상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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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이들 문화유산 중 일부를 보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 오후에는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명청시대 그림들을 감상할 예정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이 명·청 시대의 것이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니 다행이다. 여느 때 같으면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할 뿐 아니라 그림도 여유를 가지고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은 사람들이 더 적은 점심시간 직후에 방문하려고 한다.

간송미술관이 최근 문화유산의 독점과 전시의 폐쇄성 등으로 인해 욕을 좀 먹고 있다. 일 년에 두 번 여는 전시회 말고는 간송의 유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실태조사를 하려고 해도 이에 응하지 않고, 수장고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이 많다. 간송미술관이 전형필 선생 개인 돈으로 만든 사립박물관이지만,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종류가 너무 많고 가치가 높아 이제는 공공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서 나는 생각지도 않은 전시를 또 하나 만나게 되었다. 성북 구립미술관에서 하는 '순수시대전'이다. 이곳 성북동에서 살았거나 작품 활동을 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 하는 전시회로, 수주 김환기 등 10명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어서 회원들과 헤어진 다음 오후 5시부터 한 시간 동안 이들 현대 회화사의 거장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근원 김용준·운보 김기창·소정 변관식·산정 서세옥·전뢰진. 이들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명청대의 그림에는 인문학적 전통이 살아 있다

 보화각 입구의 표지
 보화각 입구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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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정문과 전시관인 보화각에는 명청시대 회화전(明淸時代繪畵展)이라는 한자어 표지가 붙어 있다. 박에서 보니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바로 전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도록을 팔고 있지만 전시를 보고 나서 한 권 살 생각에 1층 전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지만 전시장 안에는 사람이 많아 그림을 여유 있게 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줄을 따라 가며 개개의 작품 앞에 잠깐씩 서서 감상을 한다. 전체적으로 우리가 익히 보던 전통적인 동양화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문인화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하다고 할까.

중국 회화사에서 명대(明代)에는 절파(浙派)와 오파(吳派) 그리고 송강화파(松江畵派)가 언급된다. 이들은 항주·소주·상해라는 지역적인 개념과 초기·중기·후기라는 시대적인 분류에서 출발했으나, 양식에 있어서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절파는 전문적인 직업화가들로 기교에 치중하면서도 활달한 필치를 보여준다. 오파는 선비 중심의 문인화가들로 고필법(枯筆法)과 사물의 구조 분석을 특징으로 한다. 그 중 동기창(董其昌·1555~1636)이 가장 유명한데, 오파적 경향에서 출발 송강화파를 개창한 인물이다. 그는 자연의 형상을 모사(形似)하는 게 아니라 필묵(筆墨)의 묘미를 추구했다. 그의 서화 기법은 이후 청나라 때까지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옹방강 초상
 옹방강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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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청시대 전시회에 나온 작품들은 명나라 말기에서 19세기 청대까지의 그림이다. 동기창의 영향을 받은 송강화파로부터 18세기 양주화파, 1800년 전후 북경을 중심으로 한 북경학파의 그림이다. 북경학파의 중심에는 옹방강이 있는데, 그는 송나라의 학문과 청나라 현실을 연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주자학적 이론과 고증학적 방법론을 결합한 한송절충론을 지향했다. 옹방강은 송학과 송대 예술을 선호하면서 고증학을 수용한 학자이자 서예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 추사 김정희였다.
 
이번 전시회는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청나라 수도인 북경에 오고 가면서 받은 학문적 충격과 예술적 교류를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추사는 1809년 10월 청나라로 가는 사행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처음 가게 된다. 그때 추사는 옹방강(翁方綱·1733~1818)이라는 문사이자 서예가를 만나는데, 그것이 추사의 그림과 서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사제의 연을 맺고 그림과 시를 주고받는다. 그러한 인연은 귀국 후에도 옹방강의 아들인 옹수곤을 통해 지속된다.

추사의 스승 옹방강

 구양수 초상
 구양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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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회에는 송대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가 전시되고 있다. 구양수(歐陽脩·1007~1072)가 보이고, 소동파(蘇東坡·1036~1101)가 보이고, 황정견(黃庭堅·1045~1105)이 보이고, 주자(朱子·1130~1200)가 보인다. 이들 그림은 1812년(순조 12년) 12월 이후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내준 것이다. 옹방강은 이들 초상화에 제문과 발문을 썼다.

구양문충공상(歐陽文忠公像)에는 다음과 같은 제문이 있다.

"가경 17년(1812) 겨울 12월 소재(蘇齋)에서 모사한 여릉사당본(廬陵祠堂本)이다. 추사 진사를 위해 이를 모사하였다. 북평(北平) 옹방강이 삼가 제문을 쓰다."

그리고 동파선생상(東坡先生像)에는 다음과 같은 발문을 썼다. 이것은 가경 임신(1812) 겨울 10월 초하루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옛날에 쓴 동파공의 생일을 경배하는 시 초고를 추사 진사가 책으로 꾸몄는데, 그 뒤에 동파상을 그리고 제문을 써 주길 바랐다."

 소동파 초상과 옹방강의 글씨
 소동파 초상과 옹방강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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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주(揚州) 출신의 주학년(朱鶴年·1760~1834)이 그린 옹방강 초상화도 보냈다. 제목은 '담계선생상(覃溪先生像)'이다. 담계는 옹방강의 호다. 보름달 같은 원 아래 부분에 그린 정면 반신상으로, 모자를 쓰고 구슬 목걸이를 하고 관복을 입었다. 전형적인 청대 선비의 모습이다. 그림 윗부분에는 글씨가 있는데, 담계의 친구였던 장훈(張塤)이 찬하고 제자인 왕수화(汪守和)가 글씨를 썼다.

일찍이 옥당에 재직하면서         玉堂早直
모름지기 산과 바다를 지나갔다. 嶺海曾過
태평한 시운을 만났으니            太平運會
오히려 동파보다 낫다.              過於東坡

여기서 옥당은 중국의 한림원, 조선의 홍문관을 말한다. 그리고 산과 바다는 인생의 흥망성쇠를 말한다. 그런데 동파보다 낫다고 한 구절에 이르면 상찬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든다. 이 그림을 그린 주학년은 추사보다 26살이나 나이가 많지만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추사가 옹방강을 존중해서 만든 보담재(寶覃齋)에 봉안했다.

추사의 그림은 장경과 사사표의 화법에서 나왔다

 장경의 소림모옥
 장경의 소림모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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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추사의 서화 중 세한도를 자주 언급한다. 그런데 이 세한도에 옹방강·장경·사사표의 영향이 보인다. 글씨는 옹방강의 것을 닮았고, 그림은 장경과 사사표의 것을 모방했다. 장경(張庚·1685~1760)은 황공망(黃公望·1279~1368)을 모범으로 삼고 청대 초기 사왕화파(四王畵派)의 기법을 계승한 남종문인화가다. 그의 '소림모옥(疏林茅屋)'은 바위와 교목 사이에 위치한 초가집을 그렸다. 그리고 물 건너 저 멀리로 듬성듬성 갈대숲이 보인다.

이 그림에는 '원나라 사람의 뛰어난 품격을 보여주는 바, 환하(幻霞·倪瓚)와 운서(雲西·曹知白)의 중간쯤에 해당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환하와 운서는 원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추사는 이 그림을 보물처럼 끼고 살았다고 한다. 화첩 표면에는 귀양지 제주도에서 쓴 글과 유배에서 풀려 고향인 예산에서 쓴 글이 적혀 있다.

"이는 예찬(倪瓚)과 황공망 이후의 진체신수(眞諦神髓)이니 함부로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또 천금을 주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마라. 동해낭경(東海琅嬛)이 평생 보배로 여기며 완상했다."

 사사표의 호산람승
 사사표의 호산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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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체신수는 참된 깨달음의 경지와 신묘한 본 모습으로 진수로 줄여 말한다. 그리고 동해낭경은 추사의 또 다른 호다. 사사표(査士標·1615~1698)도 장경 못지않게 추사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사표는 청나라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은둔한 문인화가다. 그는 안휘성 신안(新安)을 중심으로 활약한 신안화파로, 원말의 황공망과 예찬·명대 문징명의 오파·명말 동기창의 송강파 화풍을 계승했다. 그는 그러한 화풍에 더해 윤곽선 위주의 형상을 간결한 구도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작품은 <호산람승(湖山攬勝)>으로 호수와 산으로 이뤄진 좋은 경치를 유람하는 내용이다. 근경으로 몇 그루의 버드나무와 아카시 나무를 표현했으며 그 사이에 빈 정자가 있다. 중경으로 호수의 수면을 표현했는데 여백의 미가 아름답다. 원경으로 고기를 잡는 두 척의 배와 낮은 구릉과 산 그리고 나무다리를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안빈낙도하는 문사의 품격을 보는 듯하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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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미술연구소 백인산 상임연구위원은 예찬(倪瓚)풍의 소산체(簫散體)와 오진(吳鎭)풍의 활필체(闊筆體)를 계승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이것은 왕공(王恭)이 쓴 기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그림을 사사표 선생의 만년 최고의 작품으로 치고 있다. 경치를 보고 감정이 생겨나 그 유유자적함을 마음껏 표현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오진의 화법을 좇았으니 가히 보배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진수와 보배를 보고 배운 추사는 조선 후기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왕공이 소유하던 사사표의 <호산람승>은 북경에 간 사신을 통해 이재 권돈인(權敦仁·1783~1859)에게 넘어오게 된다. 당시 조선의 문사와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신안화파의 기법을 배울 수 있었고, 우리의 문인화에도 자연스럽게 그 기법이 스며들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간송미술관의 명청시대 회화전은 10월 14일부터 28일까지 보름간 계속된다.



#간송미술관#명청시대 회화전#옹방강#장경#사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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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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