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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만 한 사과문이네요."

반응은 냉담했다. 경희대학교 청운관 1층의 게시판 가보니, 사과 게시물엔 격려 대신 지탄의 낙서가 쓰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신문'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가. 학교 안의 '오감(五感)'의 역할을 하는 게 대학신문의 책임이자 의무이기에 학내 구성원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희대 신문인 <대학주보>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아니, <대학주보> 스스로도 23일 홈페이지 및 대자보를 통해 알린 사과문에서 "내부적으로 검토한 결과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라고 밝혔으니 '표절을 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대학주보> 1526호(2012년 10월 15일) 칼럼 <축제의 흥을 깨지 말라>를 보면 <중앙일보> 10월 6일자의 <누가 축제의 흥을 깨는가>라는 글을 상당 부분 표절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주보> 표절과 관련해 한 학생이 쓴 대자보와 이에 따른 <대학주보> 측의 사과문.
 <대학주보> 표절과 관련해 한 학생이 쓴 대자보와 이에 따른 <대학주보> 측의 사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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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그는 유쾌하다. 우리 대학생들에겐 '놀 줄 아는 형'이자 힘든 상황에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대학주보> 1526호, 2012년 10월 15일)

그는 유쾌했다. '놀 줄 아는 형'이자 두 번째 군 생활에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중앙일보>, 2012년 10월 6일)

이렇듯 세부적 표현까지 일치하는 내용이 글의 약 8할을 차지하고 있다. 같은 기자가 쓴 다른 칼럼 <우리 적은 우리 안에 있나?>(<대학주보> 1521호, 2012년 9월 3일) 또한, <한겨레> 8월 26일자 <폭력의 민영화와 독도는 우리땅>을 위와 비슷한 수준에서 표절하고 있다. 현재 <대학주보> 홈페이지의 해당 기사는 삭제돼 볼 수 없고, PDF 파일 서비스 역시 해당 부분이 백지 처리 되어 있다.

대학 언론에서도 MBC 같은 일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경희대 구성원은 물론, 대학 언론에 관심이 있는 외부인들까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SNS를 통해 <대학주보>의 표절이 널리 알려지면서 해당 기자의 사퇴와 같은 구체적인 책임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대학주보>는 이런 여론을 참고해 독자가 납득할 만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해당 기자와 <대학주보>만을 탓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칠 위험성이 있다. 물론 이번 일이 '표절'이라는 비교적 충격이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기자 개인의 도덕성과 관련이 깊은 사건이라 구조적 문제와 연결시키기엔 다소 매개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과 대학 언론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잇고자 하는 것은 그 구조의 허약함 때문이다.

악순환이다. 어떤 게 먼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외적 압력 → 신문의 질 하락 → 독자의 외면' 사이의 악순환구조가 좀처럼 깨지지 않고 있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기자가 기사를 쓰는 데 모든 힘을 쏟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MBC, YTN을 포함해 많은 제도권 언론이 겪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주간교수, 외부적으로는 대학본부, 총학생회 등과의 갈등으로 신문 일부 지면이 백지로 나가거나 아예 발행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발행된 신문을 통째로 수거해 가는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관련기사-<예산 삭감에, 신문 수거...'시들시들' 대학 언론>). 이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현재 <대학주보> 홈페이지(media.khu.ac.kr/khunews/).
 현재 <대학주보> 홈페이지(media.khu.ac.kr/khu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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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MBC를 보자. '안철수 표절 보도' 헛발질을 하고, '확연히 다른 두 김근태'의 자료사진을 바꿔 내는 등 방송의 질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이고 있다. <PD수첩> 작가들에게까지 해고의 칼부림을 서슴지 않고, 파업을 한 노조원들을 여의도가 아닌 MBC아카데미로 출근시켜 '내가 만든 브런치' 따위의 교육을 받게 하는 게 분명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언론매체 신뢰도에서 2009년(19%), 2010년(18%) 1위였던 MBC가 얼마 전 조사에서 5위(6.9%)로 주저앉게 된 것이다(<시사인> 266호 보도, 1순위 응답 기준).

똑같은 일이 대학 언론에서도 일어난다. 앞서 말한 내외적 갈등은 대학 언론이 제 역할을 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 기자가 쓰고 싶은 기사를 못 쓰고, 쓴 기사를 검열당하는 것은 물론, 아예 신문사가 해체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주 독자인 학내 구성원이 대학 언론을 신뢰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언론의 힘은 독자... 외면보단 격려를

기자가 지난해 전남대학교 신문인 <전대신문> 편집국장을 맡아 할 때의 일이다. 대학본부의 한 직원에게 온 기사 요청을 거부했더니 대뜸 그 직원이 "학교 신문이면 학교 홍보도 해주고 그래야지"라고 말했다. 총장이 발행인이고 운영 재원이 대학본부에서 나온다는 논리다. 당연히 그 의도와 목적이 좋다면 홍보의 성격이라도 기사화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안이 다른 사안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높은 가치의 것을 신문에 싣는 게 당연하다. 즉 자본에 따른 우선순위가 아니라 가치에 따른 우선순위인 것이다.

올해 초 서울 지역의 대학 언론 관계자들을 만나 위의 이야기를 했더니 대체로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모든 학내 구성원이 그 같은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고, 각 대학별로도 사정이 조금씩 달라 전체적으로 대학 언론의 위상을 평가하기엔 어렵겠지만 위의 사례가 대학 언론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대학신문의 '냄비 받침화'와 같은 비아냥거림이 생긴 것이다.

다시 <대학주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번 사건이 공론화 된 것은 한 학생의 대자보를 통한 것이었다. 실명을 밝힌 이용우씨(언론정보학부)는 대자보에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기자 스스로 이런 행위를 반복하는 현실에 절망합니다"라면서도 "졸업 후에도 학교 소식이 그리울 때면 <대학주보>를 만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대학주보>가 자랑스러운 학교 신문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대학주보> 표절 사건과 관련해 SNS에는 비판과 함께 격려의 의견이 나오고 있다.
 <대학주보> 표절 사건과 관련해 SNS에는 비판과 함께 격려의 의견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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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있어 독자의 관심은 곧 재산이다. <대학주보>의 입장에서 이번 일이 알려지지 않고 아무 논란 없이 지나갔다면 그것이 더 슬픈 일이고, 손해인 것이다. 때문에 독자들이 이번 일을 향해 비판과 함께 격려의 의견을 표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학문제 전문 블로거 하이네(필명)는 자신의 트위터(@kor_Heinrich)를 통해 "<대학주보> 참 좋아하는 학보사인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더 나은 기사를 쓸 수 있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경희대 학생인 김지수씨(언론정보학부)도 "언론에 관심이 있는 한 학우로서 <대학주보>가 이번 사안을 토대로 좀 더 긴밀한 고민과 반성, 실천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학 신문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독자 입장에서 신문을 외면하는 것은 좋은 대응이 아니다. 관계 청산보다 관계 정상화가 '소통'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문제가 된 기자와 대학신문을 향한 질타와 함께 이들을 억누르는 구조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결국 언론의 힘과 언론의 정상화는 독자에 달렸다. 내가 몸담은 대학 또는 내 주변 대학에 존재하는 언론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어떨까. 이들이 자신들을 억누르는 구조와 힘 쏟아 싸울 수 있도록 응원해주길 바란다.


#대학주보#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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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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