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전주에 살 때 순창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그쪽 지역에서 친구가 목회하고 있던 까닭이었죠. 가끔 그곳에 가면 그 친구는 맛난 고추장과 된장을 내놓았습니다. 그걸 고추나 오이로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그 맛이 끝내줬습니다. 처음엔 왜 그렇게 맛있는지 몰랐지만, 그곳이 바로 '순창 고추장' 지역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5년 전에는 청년들과 함께 포천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가까이 군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등병 청년 하나를 만나고자 함이었죠. 이른바 면회를 간 것입니다. 본래 그 청년은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란 녀석이라 군 생활이 무척 힘들 걸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군 생활을 의연하게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만난 곳이 포천에서 유명하다는 갈빗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먹는 갈비 맛과 서울에서 먹는 갈비 맛이 다를까 싶었습니다. 내 입맛에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데, 함께 했던 청년들은 너무나 맛이 좋다고 야단을 떨었죠. 그와 함께 옆 테이블에서는 그 유명하다던 '이동 막걸리'도 마시고 있었고요.
'지역 음식'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될까요? 지역마다 유명한 음식들을 떠올리게 쉽게 하려면 말입니다. 아니면 '지역 특산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하듯이,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생산하는 먹거리들을 세계적인 것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죠. 그걸 잘 개발하고 세계에 알리면, 그만큼 부가가치도 엄청날 테니까요.
"특산물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고 혼과 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의 정신에서만 성장하고 완성될 수 있는 절대적인 원형질이 바로 특산물인 것이다."(서문)채희숙의 <특산물 기행>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서 나오는 많은 특산물은 그에 걸맞은 혼과 열정이 들어 있다는 뜻이죠.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15∼20년 전, 6년 동안 잡지에 연재했던 '특산물 기행' 기사를 오늘의 시점에 맞게 재정리한 것입니다. 20년 전 대나무를 다듬고 모시를 짜고 술을 빚고 고추장을 담그던 '그분들' 곁에는 그 아들과 딸과 손자와 며느리가 가업을 잇고 있다고 하죠. 특산물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혼과 정신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얼개로 짜여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의 전통공예'이고, 둘은 생활 속에 함께 발효된 '한국의 맛' 그리고 마지막 셋은 '지방 특산물'입니다. '전통공예'하면 떠오른 것들이 있죠. 전남 담양의 죽산물, 경북 안동의 하회탈, 경기 이천의 도자기, 전북 익산의 보석들이 그것입니다. 또 '맛'으로 유명한 것은 앞서 말한 경기도 포천의 이동막걸리, 경북 경주의 황남빵, 충남 논산의 강경젓갈, 전남 여수의 돌산 갓김치 등이 있죠.
"손님이 뜸하면 작업을 쉽니다. 좀 기다리더라도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빵을 맛보게 하기 위해 미리 만들어 놓지 않아요."(197쪽)그 유명한 경주 황남빵에 관한 최상운 사장의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만든 그 빵은 해방 전엔 한 개에 50전 했고, 해방 뒤엔 2환, 5환, 10환으로 오르다가 5·16 이후에는 화폐개혁을 거쳐 2원, 1993년에는 한 개에 200원, 지금은 한 개에 700원에 달한다고 하죠. 그렇지만 중요한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도매로 낼 만큼 많이 만들 수 없고, 떼 돈 벌 생각도 아니기에 정한 값만 받는 것이고, 크리스천이기에 주일엔 일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입니다.
이 책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지방 특산물'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충북 단양의 마을, 전남 무안의 양파, 경북 상주의 곶감, 광주 무등산 수박, 전남 나주의 배, 경북 영덕의 대게, 그리고 강원 양양의 연어 등, 20개가 넘는 지역 특산물을 소개하는 게 그것입니다.
전남 무안은 내가 태어난 전남 신안군 지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지역이죠. 그곳을 거쳐서 내 고향 땅을 밟습니다. 그곳이 양파로 유명하다고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실은 내 고향 땅 지도에서도 양파를 재배하기는 마찬가지였죠.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그것을 재배해서 수입을 올리곤 했으니까 말이죠. 다만 무안으로 유입된 양파 재배가 차츰차츰 내 고향 땅까지 흘러들어왔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됩니다.
"유학생 정순달씨가 일본에서 가져온 품종으로 알려진 무안 양파는 해풍을 쐬며 자라기 때문에 맛과 향이 독특하고 무안의 황토밭(무안의 토질은 모두 비옥한 황토다)에서 재배돼 성인병 예방과 항암작용에 효능을 지닌 셀레늄 함량이 풍부하다. 해풍은 해충을 막는 역할도 해 양파의 작황을 좋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안군에서는 바닷가 마을에서 양파를 집중적으로 재배하고 내륙에서는 양파밭이 거의 없다."(321쪽)무안 양파, 내 고향 양파가 그런 유입과정을 거친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양파가 중금속을 해독하거나 분해시켜서 몸 밖으로 배출해서 발암위험을 막는 데 탁월하다는 점이겠죠. 민간요법에서 양파를 '약파'로 부른다고 하니 그만큼 약용 효과가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양파김치와 양파장아찌, 그리고 양파소주랑 양파와인 등 다양한 가공품을 생산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하니, 참 좋은 생각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옛 고향의 맛과 멋을 한껏 즐겼으면 합니다. 어렸을 적 커가면서 먹고 자랐던 각 지역 특산물이 어떻게 빚어지고 생겨났는지, 그에 따른 소중한 추억들도 떠올리면 좋겠죠. 다만, 20년 전이나 지금에나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전통 그대로를 이어받는데, 이제는 그 지역 특산물의 주산지가 바뀌고 있다고 하죠. 지구 온난화와 같은 문제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도 함께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특산물 기행 - 대한민국의 맛과 멋을 찾아 떠난 팔도 명물 견문록| 채희숙 (지은이) | 자연과생태 | 2012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