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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넘긴 아사히가 이십 년이나 오순도순 잘 살아온 남편과 이혼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실부인 자리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하녀와 함께 흰떡을 구워먹고 있던 어느날 저녁 무렵이었다. 친오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믿기지 않는 명령에 그녀는 결사적으로 저항하지만, 남편의 할복자살과 히데요시의 반 협박, 어머니의 눈물 어린 호소 속에 결국은 이에야스의 비어있던 정실 자리로 들어서고 만다.

이에야스 역시 당시 '할머니급'으로 취급받던 40대 여성을, 그것도 라이벌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정실로 맞고 싶을 리 없었다. 여자도 자식들도 넘치도록 많았고, 정실의 자리도 일부러 비워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 역시 힘의 균형을 위해 아사히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히데요시의 처남 자격으로 교토를 방문하여 잠시나마 전쟁의 예봉을 피해갈 수 있었다. 결국 희생양은 아사히 히메였다. 그녀는 이에야스의 성안에서 거의 유폐되었고, 죽은 남편의 환영을 보다가 서서히 미쳐갔다.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결국 오사카로 돌아와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때가 언제라고?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니까 16세기 중반이나 후반쯤 되겠지."
"일본은 그때만 해도 유교문화가 별로 없었던 모양이야. 결혼한 지 한참 된 여자를 이혼시키고 다른 사람 부인으로 보내는 게 가능한 거 보면."
"그런 거 같아. 이거 읽다보면 일본하고 조선하고는 너무 달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머니도 영주 부인이었는데,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상대편 영주한테 바쳐졌거든. 이미 아이가 다섯이나 있었는데도 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지. 조선시대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지."

신랑과 함께 출퇴근을 같이하면서, 우리는 각자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러나 찰떡같이 재미있는 이야기의 출처는 늘 내 쪽이다. 나는 '소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경제경영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는 조금 멀리 놓고, 이번 가을에는 본격적인 '문학'에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떨까. 그렇다면 이 책, 우리 아버지도 읽으셨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권해본다.

지하철에서는 역사소설이 제격

이렇게 긴 역사소설을 완독하는 것은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집. 이렇게 긴 역사소설을 완독하는 것은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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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과 겨울에 걸쳐, 나는 17년의 공력을 통해 완성된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게 되었다. 원래 일본 여행을 준비하며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은 1950년부터 <주니치 신문>등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다.

작가는 일본의 2차대전 패전 후, 미군의 진군과 전후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최대의 혼란기였던 전국시대를 평정한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언젠가는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32권이나 되는 역사소설을, 그것도 외국의 역사소설을 지하철에서 읽기가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1권만이라도 읽어보면 그것이 기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소설은 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재미있는 장르이다. 더욱이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된 것이기에 지루할 틈이 없다. 또 32권짜리라는 숫자 앞에 주눅들 필요도 없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독서의 재미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 사회는 '독서를 권하지 않는 사회'다. 독서의 중요성을 그토록 열심히 설파하지만, 그런 주장은 초등학교까지만 적용된다. 중학생이 되어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이 독서를 하면 그 독서는 근심거리가 된다. 고등학교에서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독서를 못하게 하며, 고3이 되어서도 독서를 하는 학생을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에 필요한 책과 씨름하기 바쁘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독서할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과로사를 피할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의 보급이 일반화되었고, 그나마 독서에 유용한 시공간이었던 지하철도 스마트 폰이 제공하는 각종 오락과 단편적 기사를 소비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스마트폰이 "제2의 바보상자"가 되어 정보화 사회에서의 국민 우매화에 기여하는 것은 아닐지. 예전에는 컴퓨터 중독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지만, 지금은 정확히 말해 '스마트 폰 중독'이 일반 컴퓨터 중독보다 더 무서운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하철 공간에서나마 잠시 폰을 접고 긴 호흡으로 책을 손에 잡는 것이 기계와 단편적 정보의 노예가 되지 않는 지름길이 아닐까.

# 역사소설의 재미 하나. 이거 진짜 있었던 일이야?

역사소설은 항상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전제가 깔리니만큼 더욱 생생하다. 물론 역사소설의 피할 수 없는 단점인 사실 왜곡이나 특정인물 미화가 가끔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일본 소설이니만큼 철저히 자국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부분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허나 그것도 이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니, 알아서 해될 것은 없지 않을까.

자, 드디어 임진왜란, 아니 이들의 언어를 빌자면 조선출병 부분이다. 이 부분을 빨리 읽고 싶어 몇 권을 건너뛰기까지 했다.

"벌써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니 곧 끝나겠지?"

조선출병 이후 파죽지세로 경성을 점령하고서, 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지 그 나라 왕이 불쌍해. 인정을 베풀어 살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염려하지 마세요. 타이코 전하(히데요시)는 심성이 착하신 분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애초부터 히데요시의 목적은 명나라 정벌이었다. 조선의 왕은 그러한 자기의 계획에 찬성하여 길 안내를 담당할 것이며, 길 안내를 잘 하면 갸륵히 여겨 상을 줄 생각이었다는 히데요시의 계획를 읽으면서는 그저 웃음이 날 뿐이었다. 이순신이나 의병장들에게 당한 치욕적인 패배가 그냥저냥 간단한 설명만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좀 실망스러웠으나 자기들의 숨기고 싶은 역사일 테니 그러려니 했다. 명나라와 강화를 꾀하면서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의 황후로 달라든가, 조선의 4개 도(道)를 일본에 할양해야 한다는 조건을 읽을 때는 참으로 황당했다. 작가는 말하기를, 임진왜란은 히데요시 인생 최대의 오점이었고 조선과 일본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만을 입혔을 뿐이란다. 작가의 그런 인식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 역사소설의 재미 둘. 가깝고도 먼 나라의 풍습과 문화 간접 체험

예전처럼 신문을 읽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든 것 같다.
▲ 지하철 안 풍경 예전처럼 신문을 읽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든 것 같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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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일본인들은 새를 잡아 국으로 끓여 먹었다. '두루미 국'은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상의 음식 중 하나였다. (지금도 먹나 궁금하다.) 맷돼지도 잡아 맷돼지 국을 끓여먹었으며, 유럽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는 유럽의 과자 문화와 올리브유 등이 들어와서 처음으로 과자점과 튀김음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니 지금도 종종 보게 되는 무슨무슨 '과자점'이라는 제과 제빵집의 간판이 혹시 일제시대 때 일본에서 비롯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동성애 풍습도 나름 충격적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라는 오다 노부나가의 연인은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미모'를 지녔다는 미소년 란마루였다. 당시 일본에서 미소년 남색이 별일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란마루에 흥미가 당겨 잠시 책을 덮고 스마트 폰을 꺼내 '란마루'로 검색해 본다. 웬 걸,  아버지와 아들 뻘 나이차인 이 두 남자의 러브스토리(?)는 이미 일본내에서 아주 대중적인 주제였다. '두루미 국'에 남색이라, 혼자 웃어가며 책과 스마트 폰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를 정도다.

# 역사소설의 재미 셋. 과거를 읽으며 현재를 생각한다

"잠깐만, 여기 이 시 좀 읽어봐."
"뭔데?"
"지세이라는 건데, 전쟁에서 져서 할복자살하기 전에 쓰는 유서 같은 거야."
"알다가도 모르겠다. 시까지 써놓고 죽는거야? "
"시뿐이 아니야. 아버지가 자식들 모아놓고 할복하는 법도 세세히 알려주고, 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주려고 뒤에서 목을 쳐주기도 해. 이걸 가이샤쿠라고 하는데, 남편이 아내의 가이샤쿠도 해주고, 자식의 가이샤쿠를 하기도 한다고."

신랑은 한시 전공이다. 중국의 한시야 물리도록 보았겠지만, 일본의 지세이는 처음 본다고 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라 그런지 뭉클하고 아름답다.

모두가 사라져야 할 만춘(晩春)이어늘
나무 끝의 꽃이 먼저 지는 이 아픔이여.

주인공 이에야스의 가장 큰 적 중 하나였던 신켄 집안의 카츠요리는 전세를 잘못 짚어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에게 대패하게 된다. 그의 어린 아들, 다섯 살짜리 코시로는 패배를 앞둔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어린 것의 어머니 오다와라 부인이 자식의 죽음을 보고 읊은 지세이가 바로 위의 시다.

돌아가는 기러기야 부탁하노니 이 한마디를
입에 물고 가서 사가미(오다와라 부인의 고향)에 떨어뜨려주렴
못다 피고 아쉽게 사라지는 꽃의
색을 머금고 있는 나뭇가지의 꾀꼬리

어린 아들의 시체를 앞에 두고 자결하는 오다와라 부인의 마지막 지세이를 읽고 있으려니,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집단자살 왜 일어났는지, 카미카제 특공대가 왜 나타났는지 알만도 하다. 이럴 때는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우리나라의 열녀들도 정조를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신랑은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꺼낸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죽음을 택한 수많은 사람들의 아픈 사연이 가만히 가슴을 적셔간다.

가장 싼 값에 얻는 기쁨, 독서는 계속된다

처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을 때는 동네 도서관에서 한 권 두 권 빌려 읽었으나, 곧 전권을 다 사고 말았다. 올해 가장 긴 소설을 읽은 덕분에 지금 내 책상의 한 칸 반이 온통 이 소설로 채워져 있다.

생각해보면, 식구들과 외식 한 번을 해도 5, 6만원이 쉽게 나오는 요즘 물가에, 책만큼 값싸고 효과적인 지식 매체도 없지 않나 싶다. 그런 생각에 부지런히 책을 사 모으고 있다. 한동안 쉬었던 대하 장편소설 읽기, 이제 한 해의 막바지를 바라보며 다시 시작해야겠다. 이번에는 미뤄 두었던 조정래의 <한강>이나 꼼꼼히 못 읽었던 최명희의 <혼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아니면 늘 생각만 해놓았던 애거사 크리스티의 전집을 독파하는 것은 어떨까. 충청도에 사는만큼 지역민의 삶을 기반으로 쓰여진 이문구의 작품들도 다시 보고 싶다. 당분간, 차를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1 - 제1부 대망 1 출생의 비밀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솔출판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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