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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숙이>가 담겨 있는, 밴드 장미여관의 싱글앨범 <너 그러다 장가 못간다> 자켓
<봉숙이>가 담겨 있는, 밴드 장미여관의 싱글앨범 <너 그러다 장가 못간다> 자켓 ⓒ doob sound
밴드 '장미여관'의 노래 <봉숙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지어졌다. 유머스런 가사와 나른한 멜로디, 그리고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친근한 싱어들의 외모.

이들이 어우러진 <봉숙이>는 단지 노래로서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 한 시대의 추억과 낭만을 퍼올리는 장치로 기능한다. 즉 타임머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타임머신을 타고 이 땅의 중년들은 그들의 어설프고 풋풋했던 청춘의 욕망을 떠올리며 '아, 그래도 우리의 시절은 순수했느니' 하는 정신적 자위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 여자는 낭만이었지만 섹스는 판타지였다. 낭만과 판타지는 다르다. 낭만은 나른하지만 판타지는 강력하다. 낭만은 정신적 유희이지만 판타지는 육체가 요구하는 성취이다. 우리는 낭만과 판타지를 동시에 요구하되 낭만을 통해 판타지를 성취하길 원했다. 그것이 이상적 과정이었고 그 역(逆)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 세대는 다른 것 같다. 판타지가 꼭 낭만이라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넘치도록 생생한 이미지(포르노)와 경계가 없어진 무개념은 섹스가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섹스는 고도의 정신적 계산이나 소모를 거친 다음에 치러야 하는 대가나 보상이 아니라 그저 정신적 유희와 동등한 무게의 놀이일 뿐이다.

그래서 요즘 세대의 섹스는 지난한 과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놀이 중의 하나로 선택의 과정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노래 <봉숙이>는 우리에게 판타지로 가는 길이었던, 잃어버린 낭만을 떠올리게 해준다.

"못 드간다... 이거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봉숙이>는 가사에 방점을 두는 노래다. 못해도 사십은 넘었을 것 같은 외모의 밴드 구성원들이 청춘 시절 연가를 재미나는 가사로 표현한 것이다(하지만 이들의 평균나이는 '불과' 30대 중반이다). 가요에 있어서 가사전달의 명확성은 멜로디에 버금갈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각종 콘테스트에서 심사위원은 늘 발음의 중요성과 정확한 가사전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봉숙이>는 이런 가사전달의 대명제를 의도적으로 뭉개버린다. 거기에는 전략이 깔려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어물어물 넘어감으로 인해 가사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초조한 남자의 심리가 오히려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싱어의 어물쩍한 발음은 <봉숙이>의 기교이자 또 다른 가사이다. 만약 이 노래를 똑부러지게 발음한다고 생각하며 비교해보자. 답은 자연스레 도출될 것이다.

노래 <봉숙이>는 나른하다. 시커먼 속을 감추고 작업에 임하는 청춘남자와 니가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내뺄 수 있다는 암시를 수시로 드러내는 청춘여자와의 게임을 나이브하게 드러내준다. 그것이 이 시대 중년남자들의 낭만을 자극한다. 판타지만 난무하는 요즘의 현실에서 '그래도 우리 시절엔 낭만이 있었지' 하는 되새김질로 헛배를 채우게 하고, 판타지에서 멀어진 이 초라한 현실을 아늑하게 가려주는 편광필터인 것이다.

가사 중에 "못 드간다. 이거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하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 가난한 청춘이 이름도 섹시한 데킬라까지 주문하는 무리를 했는데 봉숙이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순결을) 주든지 (술값을) 내놓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라. 물론 우리는 전자를 원했다. 까짓 돈이 문제랴. 그러나 우리의 봉숙이는 그리 만만치 않다.  

봉숙이, 그녀는 안다. 생물학적 욕망에 휘둘리는 수놈들의 불우한 운명과 그 뻔한 작업의 속내와 전술을. 독창적인 건 고사하고 매번 똑같은, 그 진부한 작업순서를 죽도록 답습하는 수놈들의 고지식함을 어찌 모를 수가 있으랴. 그래서 우리의 봉숙이는 불쌍한 수놈들을 위해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넘어가주기도 한다. 하다못해 데킬라 값 정도는 예의상 보상해준다.

아, 그러나 술만 깨고 간다는 우리의 작전은 매번 빗나갔으니. 영악한 봉숙이는 입술만 허락하고 우리가 헛된 꿈에 부풀어 구석구석 씻는 사이 달아나버린다든가, 작업 중에 과하게 마신 술기운 때문에 진짜로 잠깐 동안 술을 깬다는 게, 깨고보니 여관방 창엔 희뿌윰한 여명만 비치고, 책임지라고 흐느껴야 할 봉숙이는 어딘가로 토껴버린다든가.

뭐가 뭔지 모르고 허둥대며 돌진하는 청춘에게 노련한 투우사처럼 살짝살짝 비껴나가며 등허리에 창을 꽂던 그녀. 마침내 쓰러뜨렸다고 울부짖는 투우사의 승리의 외침에, '꿈 깨!' 하고 일갈하던 그녀, 봉숙이. 술값에, 여관비에, 간밤에 들였던 작업비를 정산하자니 깨질 듯한 머리가 숙취 때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았던 우리.

시간의 퇴적층에서 건져올린 '청춘 엘레지'

그렇게 몸 달았던 우리 청춘의 연가를 밴드 '장미여관'은 능청스럽게 변주한다. 어눌하고, 가볍고, 해학적으로, 그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보았던 '각자의 봉숙이'를 끌어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봉숙이'는 단지 회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것이 이 노래의 성취이자 미학이다. 

보사노바풍의 감미로움에 폴카 계통의 리듬을 약간 가미한 멜로디는 청춘의 숨겨진 욕망을 풍자와 조롱으로 드러내는 데 더없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어쿠스틱 기타의 진솔함과 더불어 마치 놀리듯 웃음기를 머금고 실실 흘리는 가사는 그 시절의 유치한 욕망을 이제는 찾을 수 없는 멋진 낭만으로 바꿔버린다.

그 상큼한 재치 앞에서 밴드 '장미여관'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것이다. 또한 전통적 밴드 구성인 어쿠스틱과 드럼, 일렉트릭 기타의 5인조 조합은 신디사이저와 디지털 믹싱으로 비트만 남은 요즘의 음악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 또한 우리가 이 노래에 끌리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노래 <봉숙이>는 시간의 퇴적층으로 사라진 우리들 청춘의 욕망을 고스란히 건져내주고 있다. 밴드 '장미여관'은 잡다한 사랑의 수사를 제거하고 세월 속에서 화석으로 남은 그 시절 그 청춘들의 욕망의 뼈대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해내 척하니 펼쳐보인다. 그래, 우리 땐 이랬어.

그나저나 그 시절, 우리가 그렇게 '자빠뜨리고' 싶었던 봉숙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어쩜 그녀의 딸들이 어디서 자빠질까봐 노심초사하는 건 아닐까.


#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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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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