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6년 신학대학을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던 학교는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씨가 다녔던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보수신학교였습니다.
입학년도를 기준으로 불과 4년 전 사건이었지만 '미문화원'과 '문부식'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후 군대를 다녀왔고, 1990년 복학을 했습니다. 그해 1월 민자당 노태우-민주당 김영삼-공화당 김종필이 3당 야합을 저질렀습니다.
3당 야합때문인지 몰라도, 4년 전과는 학교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봄 내내 거리에 나가 노태우 정권 물러나라는 목소리를 외치는 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거리투쟁'에 부정적인 학생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그 중 하나가 '교회는 사회 불의에 저항하면 안 된다'는 논리와 '시민으로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사회 불의에 저항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폈던 이들은 '권력에 복종하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구약 소예언서를 보면 당시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에게 끝없이 저항했습니다.
예언자 따르는 게 당연했지만, 그러지 못한 개신교예언자들 뒤를 따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개신교는 그동안 독재권력에 저항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장로'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묻지마 투표'를 하라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1992년 김영삼과 2007년 이명박 후보가 이에 해당합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다닌 학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합동(김영삼·충현교회)과 통합(이명박·소망교회) 장로였습니다. 두 장로 대통령 후보 소속 교회가 만약 100여 명 모인 곳이었다면 묻지마 투표의 강요가 조금은 약했을 것입니다. 장로 대통령을 뽑은 결과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비극이었습니다.
또 대통령 선거가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빅3'에 해당하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장로도, 기독교인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올해 대선에는 장로이기 때문에 찍으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교회는 '어떤 후보를 뽑을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잘 말하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 역시 신자들에게 후보자 개인 선호도가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과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후보가 누구인지를 점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어느 정도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자질과 능력이 없어 고민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김민웅 교수(성공회대) 등 15명이 쓴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도 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줄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한국 개신교가 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위기에 빠진 이유를 '한국개신교가 보수주의 대형교회 중심으로 형성돼 성경과는 어긋난 정치 행보를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장로 뽑았지만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졌다지난 5년 동안 대한민국은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그토록 바랐던 '장로' 대통령이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됐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믿는 4대강을 콘크리트로 처발랐습니다. 창조 질서를 철저히 파괴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배치됩니다. 다른 사람들 비판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장로 대통령을 뽑았던 저 같은 목사와 더불어 신자들부터 먼저 통곡해야 합니다.
하지만 통곡한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 이제는 바로 뽑아야 합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 앞에 서 있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 공평보다는 불공평이 더 판치는 이 불의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이 그 작은 답을 줍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많이 신자들이 독재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성경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은 로마서 13장 2~3절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입니다. 이같은 생각에 대해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미리아' 이야기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깨달은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서는, 또한 앞으로 더 이상 강도 피해를 입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통치방식까지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강도만난 사람만 돕는 것이 사랑인가? 그것만 하면 사랑이 완성되는가? 문제의 뿌리가 있다면 그 뿌리까지 뽑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행위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영역과 구조적·제도적인 영역을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사랑에 기초한 것이며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아닌가?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동까지 포함된다."(본문 중에서)
이웃사랑은 사회와 정치 행동까지 포함한다선한 사마리안 이야기를 대통령 통치방식까지 연결지은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지만 사랑이 구조와 제도 문제까지 변혁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치가 바로 우리 삶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오히려 더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을 보면 그들 주장이 얼마나 거짓되고 왜곡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곡되고 거짓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바로 수구기득권에 편입됐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난 자를 외면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공평과 정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를 열 때가 되었습니다. 수구기득권은 불의였고,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불의로 통치했습니다. 이제 공의로 통치하고, 공평을 뿌리내리도록해야 합니다. 그럼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정의와 공의의 통치의 내용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시편 72편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억압하는 자를 꺾는 것(72:4),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고 가난한 자의 생명을 불쌍히 여기며 압박과 강포에서 건지는 것(72:12~14)이라고 증거 한다. 이런 왕에게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의 피가 소중하며 존귀하다. 결국 정의와 공의에 입각한 왕의 통치의 요체는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한 자의 피,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성경이 왕을 비롯한 통치자에게 요구하는 핵심이다. 다윗의 나라의 특별함은 거기에 있다."(본문 중에서)
정의·공의 개념 없는 이, 국가지도자 될 자격 없다정의와 공의 개념이 없는 사람은 국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평이 없는 자는 국가지도자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이를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정의와 공의란 가난한 자의 피, 그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수구 기득권은 자신들 뱃속을 채우는 일에만 온 힘을 다했지만 가난한 자들이 요구하는 작은 것 하나도 탄압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철탑에 올라가 생존권 투쟁을 해도 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용역을 동원합니다. 더 이상 이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몸을 지닌 자들의 고통과 탄식을 위한 치열한 연민이 되어야 했다. 메시아라는 이름의 무게에 휘둘리지 않은 채 그의 정치는 높음과 낮음, 귀함과 천함, 정함과 부정함, 부요함과 가난함의 비대칭 구조를 가로지르며 한바탕 크게 뒤집어 하나님의 직할 통치를 선취하는 급진성을 가동하고서야 안식에 들 수 있었다. 창조의 원형을 머금은 그런 후련한 정치를 우리는 2013년 이후에 정녕 기대해도 좋을까."(본문 중에서)한국교회 고질병 중 하나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입니다. 이것은 사기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고통과 박해받는 자입니다. 왜 불의와 불공평, 오만과 교만 그리고 탐욕에 저항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높아지려 하고, 부요하기를 바라고,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이 통곡하고, 탄식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말로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하지만 몸으로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 탐욕을 거부하는 투표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말로는 서민과 가난한 자, 노동자와 약자를 돌아보겠다고 말하는 후보와 정당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교회는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와 신자의 혁명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창조 질서 파괴한 세력에 책임 묻는 투표를그리고 4대강을 파괴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창조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가 '장로'였습니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신실한'(?) 신앙을 보여준 그가 어떻게 이토록 창조세계를 당연한 것처럼 파괴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통곡과 귀 기울임이 필요합니다.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고 수질을 개선한다던 거짓말뿐만 아니라, 강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4대강 사업은 하나님 창조 질서의 파괴요, 하나님을 부인한 범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각종 환경 파괴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교회가 약한 피조물의 고통을 공적 저항을 통해 함께 외쳐야 할 것"이라고 일찍이 주장했던 신학자 몰트만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본문 중에서)
이제 40여 일 남았습니다. 2012년 12월 19일은 그냥 단순한 날이 아닙니다. 5년을 넘어 20년, 30년 앞날을 결정짓는 중요한 날입니다. 특히 한국개신교 신자들, 잘못 뽑은 장로 대통령이 남긴 비극을 회개하기 위해서라도 가난한 자와 약자를 외면하고, 창조질서를 파괴한 동참 세력에게 책임 묻는 투표를 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김근주·김민웅·김응교 등 씀 | 새물결플러스 | 2012.10. |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