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시스템은 국민의 건강을 보장하면서 의료비 부담을 없애는 과제와 건강보험의 효율성과 질을 높이면서 건강형평성을 달성하는 과제를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목표들은 서로 충돌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은 목표간 충돌상황에서 건강수준의 향상을 가장 큰 목표로 둔다. 한국에서는 각 목표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하다. 의료산업은 이미 높은 성장을 이룩하여 이해당사자의 갈등구조가 고착화되었고, 안정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보건의료시스템은 성숙도 되기 전에 위기를 맞고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약속, 어떻게 지킬 것인가?현재 대선후보들의 보건의료 관련 공약은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료를 산업으로만 보는 현 정부의 접근법보다는 진일보했다. 하지만 보장성 확대를 넘어 실질적 건강보장을 달성하고, 하위 목표 간의 충돌을 조율하기 위한 큰 그림이 부재하다.
한국보건의료시스템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의료이용을 위한 가계 부담이 점차 증가하면서 건강불평등은 심화되는 반면, 의료의 효율성과 질에서도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폭증하는 의료비와 의료비 증가가 건강수준의 개선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위험한 의료공급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장기 경기침체의 여파로 국민들의 의료이용 부담증가와 건강보험제도를 성숙시키기 위한 물적 토대가 취약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차기 정부가 과감한 의료시스템 개혁을 추진할 때만, 건강보험 보장성이 확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할 경우 미국, 멕시코 등과 같은 심각한 의료시스템 붕괴의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상업화된 의료공급체계 개선해야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료시스템 개혁이 필요한지 짚어보자. 현재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에서 가장 문제는 수도권 대형병원을 선두로 한 민간 의료기관의 상업적 의료공급행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민간의료기관의 과도한 확대로 인한 무한경쟁에 있다. 민간병원들은 2000년경에 이미 수요를 넘어서 전반적 공급 과잉 상태에 이르렀으며, 그에 반해 공공병상 비중은 더 이상 줄어들기 어려울 정도로 적다.
이처럼 공적 보건의료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강보험의 공적보장 확대는 민간의료공급기관에 대한 통제 상실로 이어졌다. 또한 충분한 복지재정 확보없이 확대된 공적 보장은 보장수준을 매우 낮게 설계할 수밖에 없었고 반대급부로 민간공급자의 의료공급행태에 상당한 자율을 부여했다. 이 시기 민간병의원들의 전략은 진료량 증가, 의사 성과급제, 비보험 진료, 비보험 수가 인상, 건강검진 등으로 수익증대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 민간 의료공급영역은 급격히 팽창해왔다.
이는 의료체계의 심각한 왜곡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수술공화국, 검진천국, 갑상선 환자 세계 1위국, 항생제 투여율 1위국 등 세계적인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중 유일하게 병상이 증가하고 가장 많은 약을 복용하는 나라이며 과도한 수술, 입원, 외래 이용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2006년에서 2010년 사이 시술 건 수 증가율이 가장 높은 수술 1위 갑상선 수술의 경우 2006년 2만 2천 건에서 2009년 4만 건으로 76.7%가 증가, 2위 슬관절치수술은 3만 건에서 5만 3천 건으로 73.3% 증가, 3위 일반척추 수술은 9만 3천 건에서 2009년 16만 건으로 72.7%가 늘어났다. 2009년 일반척추수술이 일본의 3배, 미국의 1.5배로 많았으며, 갑상선암 발생률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5~10배 수준으로 매년 약 2만 명의 국민이 갑상선 암 환자로 새로이 진단을 받고 있다.
그 결과 의료비 증가 폭은 OECD 국가 중 가장 크다. 2000~2009년도 우리나라 1인당 보건의료비의 연평균 실질증가율은 7.7%로 OECD 평균인 3.6%에 비해 두 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그림2] 참조).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료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고령화로 인한 의료수요의 증가이다. 하지만 2011년 현재 우리의 노인비율은 12%로 선진국에 비해 낮음에도 불구하고 의료비가 폭증하는 이유는 경제적 수익을 위한 의료기관의 과도한 의료공급 때문이다. 2020년 안에 노인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 수준에 육박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낭비적 공급 구조를 개선하지 못할 경우, 의료비 폭등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의료민영화와 보건의료의 공공성 확대는 양립 불가능수도권 대형병원이 외래환자마저 독식하는 구조가 정착되면서 중소 병의원들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값비싼 비급여 시술이나 비만, 탈모, 성형 등 비치료적 영역을 확대하면서 상업적 의료행태는 증가하고 있다. 여기서 발전한 주장이 의료민영화이다. 영리병원, 당연지정제폐지, 민간보험활성화로 이어지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의료공급자본 수익창출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지경부 등 경제관료들까지 합세하여 의료민영화를 한국사회 미래성장동력으로 위장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 퇴임 4개월을 남기고 전격적으로 통과된 경제자유구역내 외국 의료기관 허용 고시로 지난 10년간의 의료민영화 시도는 정점에 섰다. 외국의료기관은 사실상 국내영리병원으로 국내기업 50%가 투자가 가능해,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투자자는 삼성증권, 삼성물산, KT&G이다. 국내기업이 50%, 일본 다이와증권이 50%를 투자해 사실상 삼성재벌 소유의 기업이며 직접 운영도 가능하다.
의료민영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의료산업활성화를 위한 규제철폐와 공적의료체계 확대는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장성을 강화해서 의료이용 문턱을 낮추는 것은 예산을 확보하는 문제이며, 의료산업육성을 위한 제도개혁은 다른 영역의 과제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담론은 매우 왜곡된 것이다. 의료민영화의 핵심인 영리병원 허용, 당연지정제 폐지 등은 전체 시스템을 영리화시켜 공적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이미 이론적으로 합의에 도달한 내용이며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실증적으로도 검증이 끝난 내용이다.
한국 보건의료시스템 개혁을 위한 과제이처럼 한국사회 보건의료 시스템은 장기적 계획 하에서 개혁이 필요하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는 것만을 통해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일면적이며 재정확보 논쟁으로 빠지게 되는 함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예산확보를 통한 보장성 강화만을 담고 있는 각 후보들의 보건의료공약은 보다 근본적 개혁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내용을 제안한다.
민영화 시도에 대한 명확한 반대입장먼저 의료민영화 시도에 대한 명확한 반대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단순히 의료민영화반대를 천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역경제 활성화 담론에서 벗어나 지역주민 건강증진을 위한 공적의료시스템 확보를 핵심에 두는 정책을 재구성해야함을 의미한다. 특히 이번 영리병원 구체화 고시 통과를 철회하고 한미 FTA가 초래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 영역의 민영화, 영리화 시도를 극복해야 한다. 이는 한미 FTA가 본격화되기 이전 최소한의 공적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의료공급에 대한 공적 규제 부활공적의료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민간의료공급에 대한 공적 규제를 부활해야 한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기존에 있던 기본적 병상 규제 및 의료공급에 대한 규제가 대부분 철폐되었다. 한국 의료에서 90%가 넘는 민간의료공급에 대한 규제와 공적영역으로 전환없이 국민 건강달성, 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은 불가능하다. 지역별 병상 총량제를 도입해 과잉공급을 차단할 필요가 있으며 CT, MRI 등 고가의료장비와 신의료기술 역시 무제한적인 공급과 도입을 제한해야 한다.
지불제도 개선현행 행위별수가제는 불필요한 과잉진료를 유발하는 경향이 매우 크다. 특히 수도권 대형병원의 의료비지출 집중은 행위별수가제에 근거하고 있다. 행위별수가제는 불필요하거나 고가의 의료행위를 조장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1차 의료기관은 주치의제도를 도입하고, 입원에 대해서는 포괄수가제 등을 도입해야 한다. 또한 현재 약제비는 건강보험 지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강도 높은 약제비 적정화방안을 시행해야 한다. 의료비 및 약제비 총액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
공공의료 확충공적의료시스템의 확충의 기본은 공공의료기관의 물리적 확충이다. 기존 부실 민간병원을 인수하거나 의료취약지역이나 응급, 전염병, 만성질환, 일차의료 대책이 필요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설치하는 방법들이 가능하다. 또한 공공의료기관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적 거버넌스 구조와 수익성이 아닌, 공익달성수준에 근거한 평가기준 마련 등의 과제가 요구된다. 지불제도 개편, 일차의료, 보장성 확대 등의 개혁과제를 공공의료기관을 우선으로 집행하면서 제대로 된 공공의료기관 성공사례를 만들어 가야한다. 더불어 공공의료기관에서 먼저 무상의료인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면서 수준높은 의료기관 모델을 정립하면서 민간의료기관을 보다 정상적으로 견인해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일차의료 강화일차의료 강화는 국민 건강증진과 효율적 의료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영역이다. 제대로 된 일차의료는 전면적 주치의제도 시행으로만 가능하다. 여건성숙이나 이해당사자 합의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실행계획을 가지고 지금 당장 단계별로 추진해야 한다.
의료개혁 의지와 세력화가 필요지금까지 대선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하지만 이야기되지 않는 보건의료분야의 정책들을 살펴보았다. 의료는 복지의 일부분이기도 하지만 이해당사자와 복잡한 조직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복지의 측면에서만 접근해서 재정투여를 통한 보장성 확대 논리에만 매몰될 경우, 불합리한 시스템이 야기할 낭비와 위험요인을 조절할 수 없다. 가장 망가진 의료시스템을 갖고 있는 미국역시 공적으로 사용하는 의료보장의 규모가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시스템을 공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돈먹는 하마를 넘어 건강에 위협을 주고 국가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한국 보건의료시스템 역시 매우 취약한 구조에서 출발해왔으며 달성한 성과 못지않게 위기요소 또한 다분하다. 이에 대한 논의와 연구는 매우 많으며 필요한 정책과제 역시 충분히 제출되어 왔다. 허나 국민의 정부 이래 15년 동안 보건의료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은커녕 더욱 악화되어 왔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기존 시스템과 갈등을 감수하면서 개혁을 달성할 정책의지이며 의료개혁집단이 세력화이다. 대선시기는 표를 의식하고 당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의 계절이 중요한 이유는 미래사회에 대한 논의와 세력화이며 이것이 바로 정치이다. 대선후보들은 한국 보건의료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의료개혁의 세력화를 고민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은경 기자는 새사연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