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텃밭 농사라고 해도 농기구는 고루 갖추어야 했다. 괭이 삽 낫 호미 곡괭이 쇠스랑 가래 등등. 삽과 괭이도 종류별로 갖추었고 낫도 너댓 자루는 될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준비한 것이 호미였다. 고구마와 야콘을 캐러 올 사람들을 예상하고 날이 넓은 호미와 날이 좁은 호미를 합해 열 자루도 넘게 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호미를 한꺼번에 써본 적은 딱 한번 뿐이었다. 야콘과 고구마를 매월 캐는 일도 아니고 또 야콘과 고구마 캐는 시기를 맞추어 사람들을 부르지도 않았기에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호미는 주로 아내의 전용물이었는데 아내는 날이 넓은 호미보다 날렵한 호미를 애용했다.
그렇다보니 작고 납렵한 호미는 흙을 휘젓고 다니느라고 녹이 슬 새가 없었지만 날이 넓은 호미는 하우스 한 쪽에 박힌 채 녹을 뒤집어 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오래되면 늙거나 닳듯이 그간 6년째 같은 종류의 호미만 사용한 탓에  호미도 날이 무뎌지고 줄어든 것이다.

그 사이에 두 세 자루는 어디에 두었는지 아직도 기억에 없고 남은 호미 하나는 손잡이가 깨지기도 했다. 호미도 수명이 다 한 것이다. 노지의 고구마를 캐면서 아내에게 날이 평평한 녹슨 호미를 찾아 주었더니 손에 익지 않아 불편하다고 했다. 내가 써 봐도 고구마를 캘 때 고구마 사이의 흙을 조심스럽게 긁어내는 데는 날이 넓은 호미는 제격이 아니었다.

오늘 날렵한 호미 다섯 자루를 사왔다. 당장 내일 하우스 안에 심은 고구마를 캐려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장간의 쇠 냄새가 가시지 않은 호미와 아내와 고락을 같이 해온 이제는 손잡이도 없는 닳은 한 자루의 호미를 같이 보니 순간 숙지원의 역사가 보이는 듯 했다. 우리가 심은 고구마와 야콘을 캐기 시작한지 6년째. 아내는 오직 호미 한 자루로 온갖 풀을 매고 꽃밭을 가꾸고 가을이면 고구마와 야콘을 캤다.

아내의 일벗이었던 호미

비록 날이 무뎌지고 손잡이도 잃었지만 어찌 허술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은퇴 기념식은 못할지라도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다.

호미 6년 동안 아내의 일벗이엇던 호미와 새로 사온 호미를 나란히 두고 기념촬영. 손잡이도 그렇지만 날이 닳은 점은 비교된다.
호미6년 동안 아내의 일벗이엇던 호미와 새로 사온 호미를 나란히 두고 기념촬영. 손잡이도 그렇지만 날이 닳은 점은 비교된다. ⓒ 홍광석

풀을 베는 데는 낫이 유용하고 땅을 파는 데는 괭이, 흙을 쳐올리는 데는 삽만큼 효율적인 농기구가 없다. 때문에 제 몫의 일을 가진 농기구를 두고 어느 것이 최고라는 찬사를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늘밭 참깨밭 콩밭의 작은 풀은 삽이나 괭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거진 철쭉의 비좁은 틈에 숨은 풀을 찾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일도 삽이나 괭이가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풀의 허리를 베는데 능한 낫도 풀의 뿌리는 뽑는 데는 호미를 따르지 못했다.

호미의 장점은 다른 농기구에 비해 작고 가볍다. 그런 호미는 사람들에게 크게 부담을 주지 않아 주로 사용하는 여성들이 종일 김매기를 해도 다른 연장에 비해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또 호미는 주인의 뜻을 거슬려 낫처럼 살을 베거나 삽이나 괭이처럼 주인의 발등을 찍고  주변 사란의 머리를 때리는 일이 없다. 설사 미련한 주인이 해찰하다가 손등을 찍어도 큰 상처를 남기지 않은 조심성까지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호미의 절대적인 미덕은 뭐니뭐니 해도 주인에게 순종하는 점이라고 본다. 작고 가벼운 몸으로 주인의 손이 되어 날래게 움직여 풀을 잡는 모습은 몇 마디의 칭찬으로  부족할 것이다.

순하고 착한 호미

작지만 제 할 몫의 일이 있기에 호미는 오래도록 이 땅을 지켜왔고 기계화된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6년을 아내의 손노릇을 해준 호미를 오늘 퇴역시킨다. 이미 닳은 괭이, 날이 빠진 낫, 자루에 금이 간 삽이 있지만 손잡이가 없는 호미는 더 쓸 수 없기에 숙지원의 역사를 담은 유물로 보관할 작정이다.

"모든 사람에게 삽이나 괭이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지 말자. 쓰임새가 다른 농기구들의 조화가 우리 밥상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 다른 농기구에 비해 체구가 작고 가볍지만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지만 결코 얕봐서는 안 되는 호미, 따뜻한 밥과 맛있는 찬을 먹기 전 가끔은 농부의 손에 들려진 호미의 수고를 기억하자."

당당하게 퇴역하는 호미를 위해 짧은 송사(頌辭)를 남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 등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호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개인의 잔잔한 기록도 역사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봄 길 밝히는 등불, 수선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