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으로 인한 공무원 시험 준비생 급증, 생활고로 인한 자살률 상승, 자영업자 500만 시대, 가계부채 1000조·정부 부채 1200조 시대, 양극화 심화, 골목상권 파탄, 비정규직 증가, 물가급등…'
지난 5년, 이명박 정부의 서민 경제 성적표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 수출 증대, 소득 상위 10% 대규모 감세, 법인세 감세, 공기업 민영화, 주요 대기업 순수익 역대 최대…' 등 이렇듯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은 그야말로 살기 좋은 5년의 세월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자영업자가 살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좋은 나라, 서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외쳤다. 과연 그 공약은 다 실천이 되었고, 정말 서민들의 삶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5년 전보다 나아졌을까?
지난 5년, 양극화가 더 심화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불안정안 서민들은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영업자로 전환했고 그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갔다. 자영업자 500만 시대라고 한다. 월평균 수익이 150만 원도 되지 않는 상점들이 수두룩하고 평균 부채는 1억 원이 넘는다. 하지만 두 집 중 한 집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폐업을 하고 나머지 한 집도 가게 문 닫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OECD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복지 수준을 갖춘 대한민국에서 폐업은 곧 삶의 파탄을 의미한다. 감당할 수 없는 부채로 희망을 잃은 서민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빈곤에 허덕이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복지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에 실업은 빈곤이 되고 빈곤은 곧 사회문제가 된다. 사회안전망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의 실업과 빈곤은 양극화의 문제를 더욱 심화 시키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경제적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가 없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소득 상위 10%에게는 천국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소득층부터 중산층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90%에게는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대안으로 나온 공약이 경제민주화이고 최근 그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며 정책으로 수렴하려는 노력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복지의 문제는 5년 안에 단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적절히 수립해 나가야한다.
하지만 현재 대선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있으면 본인들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당장 내일이라도 복지국가가 건설되는 마냥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대통령은 말 한마디, 정책 하나에도 신중하게 처신해서 공약을 발표해야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장·단기 계획을 확실히 세워 점진적으로 좁혀 나가야한다. 말뿐인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될 뿐이며, 또다시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최근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복지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고자 하며, 미래의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복지는 분배의 문제인가?복지국가가 되면 재정이 파탄 나고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 상황에서 아직은 복지국가가 시기상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지금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해 파이를 키워야 할 때이지 분배를 하기에는 국가 경쟁력이나 경제적 규모가 아직 미흡하다는 이유를 든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복지제도가 가장 발달하고 국가 경쟁력 면에서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북유럽의 상황을 보면 복지를 반대하는 논리가 크게 설득력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 등 북유럽 복지국가는 조세 부담률이 평균 50%에 육박하지만 다보스포럼에서 조사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설문 조사에서는 매년 1~5 등을 차지한다. 즉, 진정한 복지국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지는 비단 분배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복지제도를 갖춘 나라에서는 생산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국가구성원들 모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서 누구도 생산 현장에서 낙오되지 않게 하고 구성원 모두가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게 했기에 경제 강국이면서 복지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산업 구조조정이 필수적이다. 구조조정은 정리해고를 유발하고 산업 현장에서 내쫓긴 이들은 곧 실업자가 되고 그들의 삶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사력을 다해 구조조정을 반대하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에 복지제도가 제도로 갖춰져 있다면 이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을까? 실업수당이 현실화되고 건강보험체계가 개선되고 직업 재교육 시스템이 활성화 된다면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이 매우 줄어들 것이고, 이런 적극적인 노동 시장 정책이 고도화된 산업 구조를 더욱 용이하게 정착시킬 것이다.
선진국 도약을 위해서는 노동 시장 정책 중에서도 특히 직업 재교육 시스템의 개선이 가장 시급하다. 첨단소재·부품산업, 우주항공 산업 등 우리나라가 아직 개척하지 못한 산업의 분야가 많이 존재하고 미래의 국가 경쟁력도 이들 산업이 주도할 것이다. 그래서 정책을 실행하는 정부와 산업을 이끌어가는 기업 사이의 상호 협력의 필요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 진 것이다. 산업 고도화의 예상 소요 인력과 지출 등을 정부와 기업이 상호 협의해서 필요한 노동·자본의 이동을 재교육 시스템을 통해서 촉진한다면 성공적인 노동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전통적으로 산업정책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나라였고 그런 시스템도 많이 구축되어 있는 상태라 이러한 고도화된 산업정책과 노동정책을 펼치는 데에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는 분배라는 틀을 깨어버려야 한다. 적극적인 노동 시장 정책이 가미된 진정한 복지는 생산의 효율성을 낳고 그 생산은 분배라는 경제적 선순환을 이룩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선순환 구조는 우리나라처럼 잔여적·선별적 복지를 하는 나라에서는 이룰 수가 없다.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복지재원은 국민의 세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고소득자층의 부담이 큰데 그들은 많은 돈을 복지재원으로 내고도 혜택은 저소득층에만 돌아가기 때문에 복지에 대한 인식이 좋을리가 없으며 단지 복지는 선별적이며 시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구성원 모두가 조세 부담률을 조금 더 높여 저소득층이든 고소득층이든 모두가 공평하게 복지의 혜택을 누린다면 복지는 시혜일 뿐이라는 인식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무상급식 논란이 온 나라를 복지논쟁으로 물들게 했다. 가난한 아이들만 골라서 선별적 복지를 하자는 측과 모든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시행해 보편적 복지를 하자는 측이 첨예하게 맞섰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만 골라내자고 주장하는 측의 말대로 선별적 복지를 실시한다면 아이들의 가정을 소득별로 구별하고 가려내는 자체가 매우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인력과 시스템 비용이 막대할 것이고 소득조사 가정조사 같은 것이 부활해서 가난한 아이들의 정서적 심리적 부담감을 가중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자영업자 비중이 높고 은닉 재산이 많은 한국에서 진정으로 무상급식이 필요한 아이들을 가려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무상급식이 필요치 않은 아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될 위험성도 충분히 있고 정작 필요한 아이들이 혜택을 받지 못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경우도 분명히 발생할 수 있다.
차라리 선별적 복지에 소요되는 인력과 시스템 비용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대신 모든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이 혜택이 꼭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서도 맞는 일이고, 세금을 많이 내는 고소득층에게도 정의로운 일이다.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은 그 만큼의 복지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복지논쟁에 있어서 무상급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 혜택을 받는 아이들이 미래 한국 사회의 성장 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학생들은 배가 고파서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결국 그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을 못하니 성적에서도 뒤처지게 될 것이고 사회에 나가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그리고 선별적 무상급식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가난하여 공짜 밥을 먹는다는 낙인이 찍힐 위험성이 있고 또래집단의 영향력이 큰 성장기에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도 입을 수 있다. 이렇게 뒤처지고 상처를 입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란 아이들과 공정하고 공평한 경쟁을 할 수 있을까?
선별적 무상급식을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자기 자녀들이 아침밥을 굶고 다닌다고 생각해봐도 과연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있을까? 똑같은 출발선상에 서 있지 못한 마라톤 경주는 공정·공평한 경쟁을 외치는 시장주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출발선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신체 건강한 사람과 다리가 하나 없는 사람이 공정하고 공평한 경주를 할 리 만무하다.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의족도 달아 줘야하고 달리기 연습도 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공정하고 공평한 상황에서 경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복지는 비단 분배의 문제만이 아니다. 복지는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기 위한 초석이고 경제적으로는 더 높은 성장을 하기 위한 미래의 준비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라난 아이들만이 높은 생산력을 유지하고 새로운 기술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복지를 통해 사회안전망이 구축된 사회에서만이 선진국 도약을 위한 산업 구조조정을 용이하게 하고 그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복지는 성장의 문제이다.
복지, 국민들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2006년 스웨덴에서 보수정권이 탄생하고 복지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우파들은 이 현상을 지켜보며 북유럽 국가들도 복지를 줄여 나가는데 우리만 복지 예산을 늘릴 수는 없다며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격한 용어까지 써가면서 복지 국가 논쟁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실 스웨덴의 우파가 집권하고 나서 복지 예산을 축소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정도를 보면 스웨덴이 복지국가를 포기했다는 말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스웨덴 우파 세력들은 복지예산의 기본이 되는 조세 부담률 50%가 너무 높으니 45%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실제로 그렇게 정책을 이끌어갔다. 그 세력들이 한국에 있다면 우파이기는커녕 자칫 잘못하면 빨갱이라고 욕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북유럽이 하루아침에 복지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복지국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고 이익을 달리하는 세력 간의 격한 다툼이 있었다. 1932년부터 집권한 스웨덴의 사민당은 시장 친화적 경제 정책과 더불어 평등주의적 분배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했다. 사회적 반발은 만만찮았고 1938년 노사정이 한데 모여 역사적 대타협, 잘츠바덴 협약을 이루기까지 혼란과 반대는 극심했다.
하지만 뚜렷한 목적과 이상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구하여 스웨덴은 오늘날 전 국민의 고용, 교육, 보육, 건강, 노후생활까지 책임지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물론 보수당 집권 이후엔 세율을 낮춰 복지축소가 현실화 되었지만 잘츠바덴 협약의 정신을 벗어난 정도는 결코 아니다.
사회가 개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국민들의 인식 변화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가 점점 더 양극화가 심화되고, 고령화·저출산 사회로 진입해서 경제적 성장 동력을 잃을 미래의 한국을 모두가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식은 있지만 개혁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절박함이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인다. 복지국가를 외치면 정치적으로 빨간 물을 들이고 대기업을 살리자고 하면 수구적인 인간으로 내몬다. 진정한 이념 갈등은 사회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인도하지만, 지금처럼 진영 간의 감정싸움과 세대갈등은 사회를 더욱 후퇴시키게 마련이다. 이러한 행태들이 우리가 더 나은 삶에 대한 절박함이 부족해 보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웨덴은 120년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가난과 빈부격차로 절대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었다. 영양실조 시달리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넘쳐나고 여성들은 인권조차 없었고, 아동들은 학교에서 공부 대신 산업 현장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는 그런 암흑의 사회였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돈과 힘이 정의가 되는 사회를 부정하기 시작했고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고자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다. 사회 경제적 부조리에 몸서리를 치던 많은 국민들이 이들에게 호응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집권한 후엔 제도적 정비와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사람들의 의식 수준까지 복지국가에 부응하는 정도로 이끌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상반되지 않는가?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복지국가를 외치고 있지만 현재의 모습으로선 실질적인 변화를 예상키도 힘들고 사회 각 진영 간의 감정의 골만 더욱 깊어지는 모습이니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과연 문제의식에 부응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갈등을 조장하기 보다는 사회적인 타협을 이루어내야 한다. 부자들만 세금을 더 많이 내어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 모두가 복지라는 상품을 구매하여 부자든 빈자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그런 방향으로 정책을 구상해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국민적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국민의 의식 수준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재벌만 규제한다고 지금 당장 사회 경제적 부조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세금을 조금 더 거둔다고 바로 복지국가가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의 문제가 심각하고 모두가 인식하고 있으니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 정책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부자라고 복지에서 배척을 하면 사회적 갈등은 더 심화되고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점을 애초에 방지하지 위해선 '혜택에 예외가 없어야 부담에도 예외가 없다'는 보편적 복지의 기본 가치를 정책으로 실현하고 복지 혜택이 남의 일이 되지 않도록 정부는 책임지고 노력해야한다.
복지는 사회 구성원들의 협조적인 '연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만 잘살면 되지'라는 마음을 모두가 먹게 된다면 그 사회 공동체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모두가 잘살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세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개혁에 앞장서는 지도자의 포용적이면서도 강력한 리더십과 문제의식을 가진 많은 국가 구성원들의 지지가 뒷받침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처럼 선별적인 복지제도로는 그 역차별성이 너무나 강해 사회적 연대를 결코 이끌어 낼 수 없으며 결국 사회안전망 자체가 허물어지게 될 것이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더라도 보편적 복지사회를 구현해 구성원 모두가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서 복지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식을 모두가 가지게 되길 진정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