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철폐 독재타도, 건배."16일 저녁 경남 마산의 한 식당에 모인 중년 30여 명이 술잔을 들고 외쳤다. 또 단어 사이에 박수를 치면서 "우리들은 민주파다 훌라훌라, 전경들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짭새들도 물러가라 훌라훌라"를 외쳤다.
"야, 이거 얼마 만에 해보는 거야"라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 "그 때 무슨 노래를 불렀더라"고 하자 옆에서는 "그 때 '아침이슬'이 나왔나"라 묻거나 "그 때 부른 노래는 '선구자'와 '애국가'뿐이었지"라는 대답이 나왔다. 누구는 "노래가 어디 있어 그냥 고함지르고 간 거지"라고 기억했다.
부마민주항쟁 경남동지회 창립총회 자리에서였다. 1979년 10월 18~20일 사이 마산을 중심으로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던 인사들이 33년 만에 모인 것이다. 이날 30여 명이 모였는데, 참여 의사(위임)를 밝힌 회원까지 합치면 80여 명에 이른다.
강신형 공명옥 공봉식 김의권 김종대 김태만 박영주 박인준 박홍기 설진환 송철식 신성현 양석우 옥정애 우무석 유성국 이동열 이윤도 이진욱 이창곤 이창식 이창언 전수언 주대환 지경복 진이호 최갑순 등이다. 대부분 50대 이상이다.
모두 자기소개를 하는데 사연이 깊었다.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잡혀갈 때나 구금돼 있을 때 일화를 짧게 들려주는데, 재미있게 설명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 때 알게 된 여자친구가 오늘 모임에 나온다고 해서 나왔다"고 하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그동안 당당하게 살아왔기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명예회원'으로 참여한 허성학 신부(마산 양덕성당)은 "제발 관변단체처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남해성당에 있을 때 부마항쟁이 일어났다고 한 그는 "1979년 10월 18일을 생각하면 눈물겹도록 고맙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3·15와 4·19 동지들의 꼬락서니를 봐라"면서 "교만하면 안 된다. 욕심 내면 안 된다. 과거 우리가 외쳤던 정의로움이 무너져버릴 일을 하면 안 된다. 이런 정신을 끝까지 고양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그 정신이 흐려지면 차라리 이 조직을 해체"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는 이날 정관을 만들고, 임원을 선출했다. 최갑순 회장, 진이호·설진환 부회장, 이창곤 사무국장, 양석우·박인준 감사가 뽑혔다. 최 회장은 "몇 년 전 한 분이 동지회 결성을 준비하다 건강 때문에 중단했는데 그 분이 건강을 회복하고 회장을 맡을 때까지 하겠다"고 인사했다.
최갑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의로운 열정에 빛나던 청년들이 세월의 계급장을 단 멋진 초로의 신사·숙녀가 되셨다.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하여 가족이 대신 오신 분들도 있다"며 "부마항쟁이 33년이나 지나서 이제 경남동지회를 결성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박정희 치하의 부마항쟁 당시 혹독한 고통은 물론 이후 개인적, 가족적 후유증으로 말 못할 고생들을 해왔다"며 "이제라도 가족들과 친구, 이웃, 온 국민 앞에 그 날의 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폭도'나 '간첩'의 누명을 확실하게 벗겨서 우리는 바로 이 나라 군사독재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한 '민주화 유공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자"고 말했다.
또 최 회장은 "우리는 '5·16 동지'들의 비극적 최후를 알고 있고, 소탐대실하는 도처의 민주화동지회 소식도 이미 알고 있다"며 "우리는 바깥의 불의의 세력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내면의 어리석음, 과욕과 불의와 불합리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마산) 회장은 축사를 통해 "부산과 우리 지역의 일부 동지들이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아무런 소통과정 없이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면서 "이런 사태가 가장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동지회 결성을 촉진하게 되었으니 세상만사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는 앞으로 '부마민주항쟁 정신계승 사업'과 '특별법 제정·후속 사업'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업' 등을 벌인다.
이날 동지회는 창립선언문을 발표했다. 최갑순 회장이 낭독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울먹이기도 했다.
동지회는 "부마항쟁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여전히 '부마사태'로 불리며 사망자가 은폐되고, 많은 동지들이 추악한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왔다"고 밝혔다.
이어 "아직은 '부마항쟁 진상규명 등을 위한 특별법'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통과 이후에도 그 법의 온전한 실현은 또 다른 엄중한 과제"라며 "최근에는 부산과 경남지역 동지 내부가 기성 정치세력에 휘둘리며 분열되고 갈등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동지회는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개혁과 혁명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도 보았고, 정의를 위해 목숨 걸던 동지들의 모임이 그 정신을 잃어서 단순한 이익단체로 전락하고, 빛바랜 명분으로 세상을 농락하는 꼴도 허다하게 보아 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들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짐한다. 오늘 결성된 동지회는 결코 작은 것에 목숨 걸지 않고, 대의를 위해 총칼 앞에서도 함께 어깨 걸고 거리에 나섰던 그 정신을 지키겠다고, 그 정신이 흐려지면 차라리 이 조직을 해체하여, 오늘 이 조직 창립의 엄중한 뜻을 살리겠다고 감히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 이틀 뒤인 18일 마산에서 일어난 유신독재 저항시위를 말한다.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철폐'를 외치며 시작되었고 다음 날 시민들로 확산되었으며, 18일에는 마산으로 번졌다. 박정희정부는 18일 부산지역에 계엄령, 20일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해 군부대까지 나서 무자비한 진압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3명(비공식 집계)이 사망하고, 1563명이 연행되어 87명이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2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