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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소통을 원한다. 이것은 하나의 본능이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먼 옛날부터 이웃과 소통했고 그 범위를 넓혀 갔다. 소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길이다. 길은 인간 자신과 물자, 그리고 정보를 보냄으로써 소통을 가능케 했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먼저 육상의 길을 개척하였고, 이어 해상의 길을, 급기야 하늘길을 열었다. 먼 옛날에는 세계가 각각의 문명권으로 고립되었으나 길을 개척함으로써 각 문명권은 교류했으며 마침내 세계는 지구 공동체라는 하나의 문명권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육상의 길은 기원후 14세기까지 문명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인간은 걸어서, 아니면 수레나 말을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했다. 인간의 걸음은 처음에는 각각의 문명권 범위 내에서만 움직였으나 기원 전후로 그 범위는 문명권을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실크로드의 개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EMANUEL LEUTZE, 산타마리아호의 콜럼버스, 1855
 EMANUEL LEUTZE, 산타마리아호의 콜럼버스, 1855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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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이르러 동서양은 바야흐로 대양 시대를 열고 동서 교류의 주요 통로를 육상에서 해상으로 바꾸어 간다. 15세기 초 명나라는 환관 정화로 하여금 대함대를 조직하게 하여, 일찍이 없었던 대모험을 감행한다. 그 결과 명나라는 서방세계로 나가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한다.

서양에서는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선두에 나서 대양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은 소위 신대륙을 발견하였고(원주민 입장에서는 미주대륙은 결코 신대륙이 아니니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서구 중심적 사고다) 급기야 해상로를 통한 세계 일주에 성공한다. 이러한 대양시대는 동서양의 교류를 과거 육상로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후일 식민지 경쟁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유인 왕복 우주선 스페이스 셔틀을 업고 나는 보잉 747, 인류가 염원하는 빠른 속도의 의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유인 왕복 우주선 스페이스 셔틀을 업고 나는 보잉 747, 인류가 염원하는 빠른 속도의 의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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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20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하늘길마저 열고 만다. 하늘길은 인간의 소통을 극대화시켰고 걸어서 수백 일이 걸린 여정을, 배로 수개월이 걸린 여정을, 단 하루 만에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 통신수단이 가세하였다. 각종 전기통신 매체의 개발은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인터넷의 발전은 통신기술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와 누구나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전 세계의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고, 물류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문명권으로 발전케 된 것이다. 이것이 지난 2천 년 동안 인간이 이루어낸 소통의 역사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 것이 있다. 속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곧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엔트로피 증가법칙이라고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문명이 속도를 극한으로 높여 소통하면 결국에는 그 문명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고갈되고 그 문명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토록 찬란했던 로마문명이 종언을 고한 것도 바로 로마 가도가 만든 비극이라고 보는 관점이 바로 이런 시각이다.

책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저/이창희 역) 겉그림. 이 책은 물리학의 열열학법칙인 엔트로피를 사회과학에 응용한 명저이다.
 책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저/이창희 역) 겉그림. 이 책은 물리학의 열열학법칙인 엔트로피를 사회과학에 응용한 명저이다.
ⓒ 세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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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도가 물류의 속도를 너무 높여 놓아 로마제국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고갈로 이어졌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은 급속도로 힘이 빠져 결국 이민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 인류 문명적 차원에서 볼 때 인류가 만든 이 빠른 속도의 길들이 과연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걷거나 기껏 우마차 정도를 이용할 때까지는 인류는 에너지 고갈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200년밖에 안 된 지금 우리는 화석연료의 고갈을 걱정한다. 인류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현대 문명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빠른 길을 만든 것이 결국 인류 문명의 종언으로 이어지는 부메랑이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데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제러미 리프킨의 초기 저작 <엔트로피>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문명의 변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물리적 법칙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국의 공통점, 그것은 길에 있다

실크로드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는 육상로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가 개창된 이래 각각의 문명권은 길을 만들었다. 국가 단위의 사회가 만들어진 이후에 길은 정치적 목적하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군사적 목적과 통치를 위해서는 인원과 물자, 그리고 정보를 빨리 유통시킬 수 있는 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아키메네스 왕조(기원전 6세기 중엽 성립)는 현재의 이란에서 이집트 및 소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만들었다. 이 왕조는 이 대제국을 다스리는 데 길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2700킬로미터나 되는 대제국을 일주일 만에 주파하는 고속도로(물론 오늘날과 같은 고속도로는 아니지만)를 만들었다. 동서로 뻗친 대제국을 빠른 준마가 달려가면서 사람과 물자 그리고 정보를 전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진시황도 길을 만들었다. 그의 생애 업적 중 하나가 수레바퀴를 통일했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수레나 마차가 빨리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제국을 통치하는 데 정비된 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폼페이의 로마가도, 로마인들은 이런 도로를 제국 곳곳에 만들었다.
 폼페이의 로마가도, 로마인들은 이런 도로를 제국 곳곳에 만들었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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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인들은 인류 역사에서 길이 남을 찬란한 문명활동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로마 가도라는 길을 만든 것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지금의 고속도로 개념의 로마 가도를 만들어 나아갔다. 두 대의 마차가 교행할 수 있는 폭 10미터의 돌로 포장된 길을 제국 전역(지중해 연안의 유럽 전 지역 및 소아시아 그리고 중동 나아가 북아프리카에 걸친 지역)에 거미줄처럼 깔았다. 간선만 8만 킬로미터에 달했고 지선을 합치면 30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원과 물자, 그리고 정보를 유통시킬 수 있는 빠른 길은 모든 문명권에서 공히 발견된다. 그런데 이 길들은 모두 강력한 통치체제 아래 정치적, 군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이다.

동서양을 잇는 길 실크로드

고선지가 개척한 8세기 실크로드 지도. 하트코리아에서 디지털화한 지도다
 고선지가 개척한 8세기 실크로드 지도. 하트코리아에서 디지털화한 지도다
ⓒ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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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초 아래 실크로드를 볼 때 그 역사적 의미는 우선 이 길이 한 문명권을 뛰어넘어 다른 문명권을 이어준 문명 교통로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고속도로이든, 진시황의 길이든, 로마인의 로마 가도이든 주요 간선 도로는 모두 한 문명권 내에서 만들어 운용된 길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길들이 뛰어난 기능을 한 것이 틀림없지만 어느 길도 동서양을 이어 주질 못했다. 그 길들은 모두 히말라야, 파미르 고원, 타클라마칸 사막, 곤륜, 천산(톈산) 산맥을 넘지 못하고 각각의 제국 경계 내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에 비해 실크로드는 적어도 1천 년 이상 동서양을 잇는 길로써 역할을 해 왔다.

또한 실크로드는 기본적으로 민간 부문에서 용기 있는 개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점이다. 위에서 본 고대 길들은 모두 정치적 통치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수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어 길을 닦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크로드는 개인들이 경제적 목적하에 미지의 세계와 접촉하였고, 그 접촉이 또 다른 접촉을 낳음으로써 수만 리 길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초 한무제가 장건을 시켜 서역을 개척하였고 그것이 실크로드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장건이 실크로드를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장건도 이미 놓여 있는 길을 갔을 뿐이다.

나아가 실크로드는 문화의 전파로로서 역할을 다한 길이었다. 처음에는 상인들의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이 길이 시간이 가면서 문화전파의 열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문화전파에서 핵심은 역시 종교였다. 오아시스길이라 불리는 실크로드는 기원 전후부터 천여 년 동안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동서양으로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만일 이 길이 없었다면 고대 동서양의 종교판도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크로드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모험가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상징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것을 본능으로 간직한 존재이다. 모험가들은 이 실크로드를 통해 그러한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4세기 마르코 폴로는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통해 북경을 방문한 다음 <동방견문록>을 써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을 알렸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만이 그런 모험심을 가졌겠는가. 실크로드가 동서양을 연결하는 동안 이름 없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길을 이용해 동서양을 왕래했을 것이다.


태그:#세계문명기행, #실크로드, #실크로드 문명, #로마가도, #엔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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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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