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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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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 대학입학시험관의 질문

백범 선생님! 저는 강원도 치악산 기슭에 사는 전직 훈장입니다.

1945년 해방둥이로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30여 년을 가르치다가 2004년 일선 교단에서 물러난 뒤 강원도로 내려와 이즈음은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르고도 쉽게 들려주는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현직 교단에 섰을 때, 한 학생이 대학교 수시입학시험에 응시한 다음날 등교하였습니다.

"시험 잘 봤니?"
"아니에요, 선생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습니다.

"저런."
"입시 면접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하여 물었는데 제대로 답변을 못했습니다."
"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입구의 백범 선생 흉상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입구의 백범 선생 흉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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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것도 몰랐니?'라고 그를 꾸짖으려다가 저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방 후 우리 교육의 현주소로, 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몇 해 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용 선생의 증손 이항증 선생과 일송 김동삼 선생의 손자 김중생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보름 동안 중국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했습니다.

저희 일행은 상하이시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1층 회의실에 마련된 선생님의 흉상에 묵념을 드리고, 2층 집무실 벽에 걸려있는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김구, 이동녕 선생의 사진 앞에서도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4·29 분화(噴火)'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나무 침대에서 선생의 체취를 맡은 뒤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할머니가 깊은 밤 쓰레기통에서 채소장수들이 버린 배추 겉껍질을 주워 잡수셨다는 보경리 일대의 골목길을 거닐어보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 루쉰(홍구)공원 윤봉길 의거지를 찾아 '4·29 의거 표지석' 앞에서도 묵념을 드렸습니다. 그런 뒤 뤼쉰공원에 있는 월홍교 옆 나무의자에 앉아 쉬면서 <백범일지>를 펴들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뤼쉰공원에서 거행된 천장절(일왕 히로히토의 탄생일) 경축과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장에 모든 참석자들이 빳빳이 선 채로 해군 군악대 주악에 맞춰 일본 국가 키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김구와 윤봉길(4.29 의거 직전의 기념촬영)
 김구와 윤봉길(4.29 의거 직전의 기념촬영)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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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이때를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물통 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단상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습니다.

폭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 단상 중앙에 떨어지자 곧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소리와 함께 일본국가의 남은 부분도 폭음소리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 폭탄은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육군대장, 일본인 거류민단장 카와바다를 그 자리에서 절명케 했습니다.

그밖에도 일본해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그 순간 윤 의사의 그 부르짖음은 민족 항쟁의 태풍이요, 포효였습니다.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 길이 남을 '뤼쉰공원 의거' '4·29 분화(噴火)'로 일컬어지는 이 의거는 윤 의사의 살신성인으로 장엄하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중국 장제스(蔣介石) 주석은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고 격찬했습니다. 이밖에도 이봉창 의사의 의거 등 이 모든 일들이 선생님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는 망국민이 되지 않게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 장의행렬(1949. 7. 5.)   이 사진은 기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아온 것으로 이날 서울 소공동 한국은행 앞을 지나는 장의행렬을 미 육군정보대에서 촬영하여 본국으로 보낸 것이다.
▲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 장의행렬(1949. 7. 5.) 이 사진은 기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아온 것으로 이날 서울 소공동 한국은행 앞을 지나는 장의행렬을 미 육군정보대에서 촬영하여 본국으로 보낸 것이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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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도 이런 장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쉰이 넘은 후에야 알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까막눈이었던 제가 어찌 학생에게 윤봉길 의사를 모른다고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날 저는 우리 역사에 무지 무명함을 깨닫고 정년을 5년 남긴 채 퇴직한 뒤 강원도 두메로 내려왔습니다. 이곳에서 텃밭을 가꾸며 뒷산에서 삭정이를 주워 방을 데운 뒤 참회의 심정으로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따금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나라 안팎을 쏘다니며 일 백년 전의 의병 어르신과 지난 세기의 독립운동가 어르신 자취를 더듬기도 합니다. 그런 뒤 그 이야기들을 모아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영웅 안중근><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 등을 펴냈습니다.  이 시대의 한 훈장으로 이세들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는 게 가장 시급하고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백범 선생님! 이 나라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여 다시는 망국민이 되는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게 그들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2012년 음력 10월 상달에 하늘에 계신 선생님을 우러르며 박도 두 번 절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133번째 편지로 2012년 11월 20일자로 발송하였습니다.



#김구#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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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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