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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시(詩)가 새겨진 커다란 돌 하나를 만날 수 있다. 2006년 타계한 고(故)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시비다.

박 시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시집인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펴내며 노동시의 주춧돌을 놓았다. 시비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백제 6'은 1990년대 저항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울렸던 노래,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원작시이기도 하다.

박영근 시인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여년 동안 부평에서 살았다. 시인은 이 기간에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상,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 등 그가 남긴 화려한 이력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인은 생전 신트리공원길을 자주 거닐었다고 한다. 그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가 남긴 시,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을 통해 되짚어보았다.

노동운동 불붙은 1970년대

제대를 하고, 세월도 믿음도 무심코 멱살을 잡고 흔들던 스물다섯 계급장을 떼고도 나는 / 갈 곳이 없었다. 바람 불면 허수아비 제 가슴을 치는 가을 저녁답, 어머니 또 우시고(시 '취업 공고판 앞에서' 중 일부)

1981년 성효숙씨는 미술대학 졸업을 앞두고 교내 야외전시회에 출품할 작품 만들기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석고로 사람의 모습을 본떠 작업복을 입히고 광목으로 휘감는 설치물을 만드는 중이었다. 전시회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조교로부터 '작품을 철거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시회를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씨는 교수들을 만나 그럴 수 없다고 항의했지만, 결국 그의 작품은 강제로 철거됐다.

당시는 '노동운동'을 빼놓고는 현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노동운동의 거센 물결이 일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평화시장에서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노동현장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이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전까지 '노동자' '노동운동'은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말이었다. 투쟁이 힘을 얻을수록 노동운동을 탄압하려는 움직임도 점점 극에 달했다. 1971년 한성섬유에서 노조 활동을 하던 김진수씨가 회사의 사주를 받은 같은 회사 노동자에게 타살을 당한 사건은, 노동운동가들이 생명까지 감수해야했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1976년 인천 동구 만석동에서 광목과 재봉실, 면직물 등을 생산하던 동일방직주식회사에서는 어용노조에 항의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고, 사측은 남자 직원들을 시켜 인분을 뿌리며 이를 방해했다. '동일방직 인분사건'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사측의 비열함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1979년에는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기숙사를 빠져 나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일은 노동문제를 정치문제로 확장해, 야당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종교인 등과 연대운동을 벌이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동갑내기 성효숙씨와 첫 만남

 2002년 부평4동 집에서.
2002년 부평4동 집에서. ⓒ 성효숙

성효숙씨의 작품은 이런 현실 속에서 탄생했다. 성씨는 자신의 작품이 철거당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한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 부부가 함께한 자리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선배의 남편을 만나러 온, 시 쓰는 후배라고 했다. 그가 바로 박영근 시인이었다.

시인은 그해 제대를 하고 각계각층과 교류하며 신촌에서 쌀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침이슬'의 김민기씨가 잠시 농사를 짓던 시기, 그가 농사지은 쌀을 시인이 받아 팔았던 것이다. 성씨는 어린 나이에도 다양한 이들과 만나는 시인을 참 활동적이면서도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은 "군대 가기 전엔 하루에 열 명씩도 만나고 다녔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날 성씨와 시인은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눈 채 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씨와 시인은 1970년대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다시 만났다. 문화예술이라는 공통된 도구로 시대를 고민하고 성찰하려는 대화가 더해지면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귀례 누님 / 지금은 구로동 골목 한쪽에서 / 노동자들에게 라면밥을 파는 누님 / 눈물 콧물로 키운 외아들 자식은 / 큰 학교 큰 공부 일찍 때려치우고 / 노동자가 되더니 / 데모죄로 까막소에 들어갔지 / 꼽방살이 옥바라지 치르면서도 / 눈 한 짝 이끗 않고 / 허기 든 노동자들에게 / 웃음이 많은 누님(시 '지리산 4' 중 일부)

1982년 시인은 구로3공단 부근에 살면서 제본 회사, 곤로 회사에 취업했다. 이듬해에는 집값이 싼 곳을 찾아 철산리 꼭대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성씨는 "그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가파른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뭐 불빛도 보이고, 아름답네'라는 말을 시인에게 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84년,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 출간

1984년에는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아, 대한민국'과 같은, 현실과 거리가 먼 가요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에 시인 신경림, 연출가 임진택 등 40여명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창립해 매스컴의 막강한 영향력과 대중 조작적 문화정책에 반기를 드는 활동에 참여했다. 또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문학을 매개로 한 문화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 노동현실을 담은 고인의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와 노동자 생활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공장 옥상에 올라'가 출간됐다. 이 시집으로 노동자와 사회운동가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성효숙씨는 "당시에는 그 시집이 첫 번째 노동시집이란 것도 몰랐다. 그런 문학이 흔치 않았다. 부산이나 울산에서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을 만나면서 시집의 영향력을 실감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듬해인 1986년 5월, 당시 주안 시민회관 앞에서 대규모 시국집회가 열렸다. 인천이 '제2의 광주'가 될 거란 말이 흉흉하게 오갔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성씨와 시인도 노동문화패와 함께 집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성씨와 시인은 함께 부평구 산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박영근#박영근시인#노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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