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2월 5일)은 하루 종일 폭설이 내렸습니다. 기온조차 영하 10도로 뚝 떨어져 눈은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만 갑니다. 온 세상이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9일 첫눈이 내린 후, 12월 1일 내린 눈이 아직 녹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다시 폭설이 내리니 눈은 점점 두껍게 쌓여만 갑니다. 초겨울에 이례적으로 내리는 많은 눈입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이곳 경기도 연천은 쌓이는 눈으로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김장을 해서 김장독을 땅에 묻어놓고 나니 당분간 겨울 걱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지인 한 분이 쌀 한 자루를 들고 와, 식량까지 확보를 했습니다. 텃밭 가을걷이는 모두 끝냈지만 콩은 거두어 놓기만 하고 아직 타작을 하지 못한 채 말리기 위해서 테라스에 쌓아두고 있습니다. 도리깨로 두들겨 타작을 하려고 하는데 눈이 녹아야 타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눈이 너무 심하게 내리는군요. 이런 날은 화롯불 지펴 놓고 군밤이나 구워 먹으면 딱 좋은데.""그거 좋은 생각이요. 어딘가 화로가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나가서 한번 찾아볼까?"
갑자기 옛날 어린 시절 고향에서 화롯가에 앉아 군밤을 구워 먹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는 난방시설이라곤 없고 초가집에는 집집마다 방에 화로가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모든 식구가 화롯가에 둘러앉아 밤과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지요. 부적가락과 부손으로 불씨를 다독거리며 군밤과 고구마를 구워 먹던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깊은 향수에 젖어들며 창고에 들어가 화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화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 집 주인은 옛날 농가 골동품을 좋아해서 항아리, 작두, 지게 등 이것저것 모아두고 있습니다. 화로도 어디선가 분명히 보았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창고에서 나온 나는 뒤꼍으로 돌아가 장작 옆에 뒹굴고 있는 작은 화로를 발견했습니다.
"옳지, 바로 저거야!"나는 오래된 화로에 '택택' 낀 먼지를 털어서 숯불을 지폈습니다. 먼저 마른 잔가지를 밑에 두고 종이에 불을 붙여서 불씨를 만들고, 그 위에 숯을 얹었습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연기를 쐬며 눈물을 흘리면서 화롯불을 지피고 있자니 불현듯 화롯불을 집혀주시던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님은 겨울이면 언제나 따듯한 불씨를 화로에 담아 우리의 삶을 덥혀주셨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어머님은 부엌에서 화로에 불씨를 담아 들고 들어오시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마친 다음에는 새로 담은 화롯불을 방으로 들고 오시며 그날의 일과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어른들은 화롯불로 담뱃대에 불을 붙이기도 했고, 어머님은 찬 음식 덥히기, 다듬이질, 인두질을 하는 데 화롯불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추운 날 밖에 뛰어나가 놀다가 들어오거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님은 부젓가락으로 잿불을 살짝 헤집어 놓은 후, "아이고 내 새끼 춥지?" 하시면서 까마귀처럼 꽁꽁 언 손을 끌어당겨 녹여주시곤 했습니다.
마른 잔가지로 불씨를 충분히 살리며 부채질을 하자 숯덩이에 불이 금방 붙었습니다. 나는 숯덩이가 완전히 뻘건 불덩이가 되어 연기가 사라질 때까지 부채질을 했습니다. 곧 연기가 사라지고 숯불이 벌겋게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나는 그 숯불 화로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습니다.
"와아, 화로다!""오메, 좋거! 바로 이거야!"
마침 집에는 오랜 친구가 와서 함께 며칠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친구는 화롯불을 보자 동시에 환호를 질렀습니다. 친구는 남도에서 가져온 밤, 대추, 감, 은행알 등 가을걷이를 배낭에 잔뜩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마루에 앉아 망치로 은행알을 깨서 알갱이를 꺼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친구입니다.
우리는 화롯불에 먼저 군밤을 구웠습니다. 불이 싸서(강해서) 군밤은 금방 구워졌습니다. 군밤을 한 알 한 알 까먹다 보니 우린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린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야아, 이거 셋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르겠는데!""정말 화롯불에 군 밤 맛이 죽여주네요!" 군밤을 다음에는 농사를 지어 저장해 놓은 호박고구마를 구워 먹었습니다. 이럴 때는 막걸리가 제격인데 눈 속에 갇혀 있으니 사로 나갈 수도 없고. 마침 집에 와인이 한 병 있어서 고구마와 군밤, 은행알을 안주 삼아 막걸리 대신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습니다.
"이사 1년 축하해요!""벌써 1년이 지났나? 고마워요! 친구!"
이곳 연천으로 이사를 온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다니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이렇게 화살처럼 흘러만 가고 있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은 폭폭 내리고. 눈 속에 갇힌 우리는 화롯불 옆에서 추억에 젖어 와인 잔을 홀짝홀짝 기우렸습니다. 나는 문득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사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축복의 눈이 푹푹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은 흰 당나귀 타고 사랑하는 여인 곁에서 잠이 들 것 같습니다. 화롯불이 따뜻하게 삶을 덥혀주는 밤, 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블로그 blog.daum.net/challaok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