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년이나 되었다. 1997년, 소위 IMF 사태를 바라보며 국민들은 우두망찰했었다. 그리고 그후로 국민들에게 다가온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든지 한국사회가 1997년 그날처럼 망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며, 만약 그러한 날이 온다면 그 때의 충격은 1997년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두려움이 현실화되는 것인지, 1997년 이후로는 한국사회가 어렵다는 말이 일상화 되어 있다.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전반적으로 암울한 수치와 전망이 지배적이다. 과연, 한국 사회는 몰락을 향해 가는 것인가. 그리고 그 몰락의 징후는 한국 사회만의 특징인가, 아니면 전 세계적인 현상인가.
"한국 사회는 몰락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단언하는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 강인규씨의 책 <망가뜨린것, 모른척한것, 바꿔야할것>(오마이북)은, 그래서 아주 무겁게 다가온다. 대선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이 책을 근래에 보기 드물게 열심히 읽으며 수불석권한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대화'를 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사회, 어디에 와 있는가?
이 책의 장점으로 먼저 꼽고 싶은 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이고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서부터 교육, 문화, 종교, 언론 등 전방위적인 분야의 문제점을 망설임 없는 단호한 어조로 제기한다. 또한 그 모든 문제들이 일상적, 시사적 문제들이기에 문제의 심각성과 시의성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지, 스스로 반성이 될 정도였다.
이 책의 장점은 또 있다. 한국사회의 문제가 다만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들의 윤리의식 부재에 있으며, 그러한 천박한 의식이 우리 삶의 모든 평범한 순간과 결합하고 있음을 각성케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일상적 차원에서의 문제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제시된 장은 이 책의 2장 '망가진 공동체'와 4장 '망가진 문화'일 것이다.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강요되는 감정적 친절의 강요나 지방대학의 문제, 아이돌과 한국교회의 폭력성, 문화맹 정부의 문제 등은 일상에 산재한 부조리와 폭력이 어떻게 한국사회에 겹겹이 쌓여 있는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총망라하여, 저자가 말한 '한국사회의 몰락'을 다시 생각해보자.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는 문제들이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에 의해 발생된 것이라면, 이 책은 철저히 내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의 전세계적 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불안, 자본주의 세계에 내재해 있는 보편적 문제들에 대한 담론이 정교하지 못함은 아쉬운 부분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몰락에 대한 나의 결론은 그러한 외적 요인들이 고려될 때 더 정확해 질 것으로 생각한다. 잠시 답을 유보해 두고 싶다.
비슷하나 맥락에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저자의 일갈에는 역으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OECD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통계자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살률 1위라든가, 출산율 최저 같은 수치는 분명 한국 사회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행복지수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의문이 발생한다. 2주전만 해도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전 세계에서 19번째로 행복할 것이라는 조사 자료를 내놓았으니, 행복 수치를 측정하여 발표하는 기관마다 각기 의견이 다른 셈이다.
또, 저자는 "우리나라가 '성(性) 격차지수(GGG)'에서 107위로 세계 최하위권이며, 세네갈이나 캄보디아보다도 못하다"고 말했는데, 성(性)격차 지수와는 달리 유엔 계발 계획이 발표한 남녀평등지수(GDI)는 2011년 15위였다. 비슷한 조사의 순위가 엇갈리는 현상에 대해서까지 분석이 곁들여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개인적으로는 기계적인 남녀 비율에만 초점을 둔 성(性)격차지수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OECD의 문제로 돌아와 보면, 정치 경제의 전문가들 중에서는 우리 나라의 OECD 가입이 시기상조의 오만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한국에 대한 평가들은 우리 사회가 OECD 국가가 갖추어야 할 여러 자질에 아직도 부족한 면이 있다는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저자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는 바꾸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바꾸어야 할 것들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에 대한 저자의 견해도 물론 이 책에 제시되어 있다. 일단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적인 의식을 가질 것"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현재의 사회문제에 대한 가장 큰 대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더 세부적인 사항은 에필로그에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협력과 배려의 본능"을 찾아서, "연대와 공감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말고, "네 꿈이 이루어져야 내 꿈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문제의식에 비해 위의 말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제시해 줄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이 책은 다양한 사회분야 전반에 걸친 문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문제들을 망라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면 그 '어떻게'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그 문제와 관련하여 내가 저자나 혹은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싶은 한 가지 주제가 있다. 저자가 주장한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협력과 배려, 공동체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대단히 긍정적인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미 한물간 신자유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인간은 본원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 그래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사회가 그렇게 가다보니 저자가 공동체와 나눔의 정신을 말하고,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임을 강조하는 것이 나름대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는, 복잡다단한 사회적 계층의 이기심, 욕망의 문제를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타협해 나가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안 되는 4대강 사업이나 새누리당의 셀 수도 없는 헛짓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보를 단일화하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한국 대선의 구도를 보자. 혹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그 많은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500만표 이상의 차이로 이긴 것, 지방에 살면서도 지방대를 차별하고 조금만 돈이 있다고 생각하면 배달원에게 강짜를 부리는 그 모든 문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쉽게 풀리지 않는다. 기업에게 훨씬 환경이 좋은 다른 나라에 공장을 짓지 말고 우리나라에서의 일자리를 만들라고 말한다면, 이를 그대로 따를 기업인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당연히 동의하지만, 자식은 꼭 일류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괴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좀더 큰 밑그림이 필요하지는 않는지. 잠시 장하준의 말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나쁜 사마리아 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순응주의자가 되는 편이 휠씬 쉽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잘못된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중략) 이들은 좀 더 균형잡힌 그림이 제시되면 기꺼이 언행을 바꿀 수도 있다." '침묵하는 다수'에게 권하고 싶은 책
이 책이 손에 들어온 이후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르치는 고등학교 아이들에게도 일부를 읽게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교 후배, 남편, 일터의 선생님, 잘 아는 자영업 사장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여기에 다 적지는 못하지만, 그 대화를 통해 나온 모든 말들이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의식과 실천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이 책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책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지지자들이나 소위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 권해보고 싶다. 진심으로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생업에 바빠 뉴스 한 번 보기 힘든 침묵하는 다수에게도 권해보고 싶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강인규씨의 이 책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보다는 나와는 대척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