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치러진 대선에서 기현상이 발생했다. 직전 대선은 물론이고 2002년의 것을 뛰어넘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는데도 야권 후보가 패했다. 투표율이 기록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환영할 일이나, 그것이 높을수록 야당에 유리하다는 선거의 '기초 상식'이 무너져 버렸다.
지금까지 이번 대선결과를 권역별로 나누고, 그에 따른 야권후보의 선거전략 실패에 대한 '정량적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나는 그런 분석으로는 이번 대선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이번 대선 결과, 박근혜 지지율 52%를 도식적으로 보수표로 해석하는 평범한 평가로는 이번 대선이 제기한 시대정신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현상'을 빼고 논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만일 안철수가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대선은 '2007년 대선의 재방송'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당연히 지금과 같은 투표율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가 빤한 선거에 유권자 다수가 불참하는 것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억지로 투표장에 끌어 오게 할 수는 없다.
이번 대선의 키워드, '안철수 현상'1987년 첫 직선제 대선이후 많은 국민들은 기존의 거대 양당제 중심의 정치를 겪으면서 추세적으로 정치에 등 돌리게 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성 정치가 국민을 소외시켰으며 여기에는 기득권 언론사들이 정치혐오증을 부추겼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대중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점차 멀어질 수록,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입맛대로(정치를 통해) 제도를 손질하거나 법을 만들고 심지어는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사례처럼 대법원 판결조차 불복하는 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광범위한 '정치 혐오증'은, 각각의 사회적 문제들이 결국은 정치로 수렴된다는 명제로 보았을 때, 공멸을 향해 달려가는 브레이크 고장난 폭주기관차와 같았다. 사회적 양극화, 사교육 창궐, 청년 실업문제 등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분야의 모든 문제의 해법은 그 각각이 긴밀하고 강력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그 연결고리의 종착점인 정치 영역에서, 투표를 통한 권력교체를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기존 거대 양당제에 균열을 일으켰고, 대중의 '정치혐오증'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이었음을 증명해냈다. 수많은 국민들이 그의 등장에 환호했고,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던 20~30대 유권자들을 격동시켰으며 '정치 혐오층'이라는 제3지대의 국민들로 하여금 현실의 정치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적어도 단일화 이전, 3자 대결시의 후반부 지표로만 보더라도, 20% 이상의 지지층을 형성했던 안철수 전후보는 그 이전까지 정치영역에서 사라졌던, 최소한 10%이상의 부동층·무관심층을 정치판으로 불러내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안철수의 사퇴와 문재인 지원후보직 사퇴 후 투표일을 불과 십여 일 앞두고 시작된 안철수 전 후보의 문재인 지원은 싱겁게 끝날 것 같던 대선판에 다시 바람을 몰고 왔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전후보는 '따로, 또 같이' 방식의 유세를 통해 가는 곳마다 했다. 그들은 호응을 받고 세를 확장해 나갔다. 급기야 여론조사 공표기간 마지막 지표는 일주일 후, 역전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안철수의 가세를 통한 '대선 흥행'의 성공, 이것이 이번 대선 투표율이 기록적으로 높았던 이유라는 데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투표율이 높았음에도 야권 후보가 패한 이유이다.
결론부터 당겨써 보자. 박근혜 득표율 52%가 전부 보수세력 혹은 보수정당 지지자일까? 박근혜가 보수 후보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유권자를 보수층이라고 손쉽게 개념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만일, 박근혜를 지지해서라기 보다는, 문재인 후보의 당선에 반대해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박근혜씨가 낫다는 판단을 한 유권자가 존재한다면, 이들을 손쉽게 보수층으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이러한 경우, 이를테면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민주당 후보를 견제하기 위한 투표행위가 상당수 있었고 그 흐름이 이번 대선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대체로 2~3%가량의 '스윙 보터'가 이번 대선 결과를 결정지었지 않았을까 싶다.
참여정부 그림자를 벗어던지지 못했던 문재인 후보이 자리에서 참여정부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이명박 후보 압승이라는 직전 대선의 '팩트'를 근거로, 참여정부를 겪어낸 다수의 유권자가 참여정부에 대한 반감이 '경험치'로 체화돼 있었다. 그 상흔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90%에 육박하는 경악할 만한 50대의 투표율을 상기해 보자. 지금의 50대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벌어진 소위 신자유주의 사조, 그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 자산의 양극화, 고용불안, 사교육 창궐의 직접적인,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연령층이다. 아직 그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지만, 혹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측이 타지역의 열세를 만회해줄 것이라 믿었던 수도권 민심 이반의 핵심 '이탈층'도 수도권 50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나는, 만일 문재인 후보 측에서 선거 며칠 전에라도 당선 후 '친노'세력의 임명직 배제를 선언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편이다. 문재인 후보 측의 'MB정권 심판론'이 잘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대통령과 지난 5년간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의도적 긴장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이고, 더 결정적으로는 문재인 후보 본인이 참여정부의 핵심이었다는 치명적 핸디캡에 있다.
현재의 50대 연령층이라면 '박정희 향수'를 느낄 법하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박근혜후보를 투표한 50대의 '폭발적 민심' 전체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박정희 향수' '큰 영애'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있을 법한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50대 연령층이 기록적 투표율을 갱신한 것은 박근혜를 찍고 싶다는 '포지티브'한 유권자들의 열망도 포함되지만, 참여정부 시기, 국민을 실망시켰던 과거를 솔직히 반성하지 않고, '친노 임명직 불참'이라는 작은 결단조차 양보하지 않는, 기득권에 안주하고자 하는 문재인 후보 진영에 대한 '네거티브'한 동기도 상당한 몫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지금의 50대는 정확히 10년 전의 40대며, 이들은 당시 노무현 후보 당선의 핵심 지지층이었다.
어설픈 '첩보전 네거티브'의 역풍선거 막판, 국정원 직원 댓글 사건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1992년 대선 당시 '초원복국'사건의 재림이다. 대선 중반 '여성 대통령'의 이미지를 차용한 박근혜 후보 측이 재미를 톡톡히 보던 중, 이런 류의 구태의연한 '공작적 공세'는 박근혜 진영에서는 역풍의 호재였다. 어차피 종이신문과 공중파 등, 불리한 언론환경의 차이를 감안했다면, 그런 식으로 사건을 처리한 것은 해프닝이었고 상대진영에게 표를 진상하는 행위였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안그래도 참여정부 실세출신의 문재인 후보에 대한 믿음을 주기 어려웠던 50대 부동층이, 자신들이 집권후 향유할 작은 기득권조차 내려좋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실망한 와중에, 충분히 네거티브라고 여길만한 사건을 터뜨려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선거를 이기려 했다'고 판단했다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번 대선에서 투표율이 높았음에도 야권후보가 탈락한 것은 단순한 보수의 대집결로 판단하기 보다, 참여정부, 혹은 민주당에 대한 '응징'의 의미도 가미해야 논리적이지는 않을까? 과연 한파를 무릅쓰고 기어이 투표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동기가 보수세력 집권을 원한다는 것 만이었을까?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 만큼 우경화됐다고 판단할 만한 객관적·사회적 지표가 존재하는가?
두 번 실패한 민주당, 역사의 뒤안길로...1987년 이후의 정치를 되돌아 보면, 민주당은 늘 명칭만 바뀐 현재의 여당 옆에 붙어 있었다. 올해 치러진 두 번의 큰 선거에서 민주당은 자기 진영내의 계파 이익을 버리지 못하고 민심을 등지고 패배를 자초했다. 안철수 정치 참여 결심의 이유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패배가 결정적이고, 그 원인은 입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기득권 공천'을 강행한 결과였다.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와의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도 똑같은 양상을 보였다. 면전에서는 새정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단일화 논의 상대자를 그림자 취급하는 언론 공작을 벌였다. 말로는 정권교체에 목숨 바칠 것 같이 하면서, 실제로는 야권 단일 후보가 되는 것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했다. 이후 기어코 안철수 후보를 끌어내렸다. 문재인 후보의 '배임' 발언은 단일화협상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조차 '친노 임명직 배제 선언'을 논의했지만, 안철수 유세 합류 이후 분위기가 좋아지니까 어물쩍 없던 일로 돼 버리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마지막 '첩보전 네거티브'를 통해 결정적인 패배를 자초했다. 이 모든 것은 민주당의 업보이며 그들이야말로 현재의 여당과 조화를 이루는 '구태정치'의 짝패였다는 것을 증명해낸 셈이다.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치혐오증의 본질이 말과 행동이 다른 '정치인의 기만'에 있는데, 새 정치를 말하면서 구태 폭로전을 구사한다면 누가 '새정치'를 신뢰할 것인가?
그렇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52%의 표가 보수층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섯부른 것일 수 있다. 오히려 지금 쯤은 동서냉전 이후에 마치 상식처럼 쓰여졌던 진영논리,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보다 어느 진영이 상식에 부합하느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정성이 있느냐로 판단해야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정치, 정치인이번 대선을 통해 해방후 시작된 민주당 영욕의 역사는 이제 막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역사는 한 해에 두 번씩이나 민주당에게 집권세력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건만, 민주당은 두 번 모두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대세를 그르쳤으니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 지금의 민심이라고 판단한다.
한때는 반독재의 선두에 서서 역사를 선도했던 민주당이여. 그대들이 언제부터 대의보다는 눈 앞의 이익에 집착하고 민의를 외면했는가를 되돌아 보길 바란다. 그리고 처절히 반성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길 권한다. 지난 총선과 이번 대선 모두, 민주당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임했더라면, 애초에 안철수가 등장할 이유도 없었으며 이번 대선에서도 충분히 집권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번 대선 패배는 민주당이 선택한 것이며 다른 이유를 달 수 없다. 마치 진보개혁의 무늬를 띄고 있으나, 사실은 '두 번째 기득권'에 불과한 민주당.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위해, 벼랑 끝에 몰린 민생을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이젠 길을 터줘야 한다.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결단을 통해 양 진영 모두를 숙연케 했던 '사실상 최후의 승리자' 안철수 전후보는 새로운 구상을 통해 정치를 계속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떤 길을 제시하고 박근혜 정권을 견인해낼지 두고 볼 일이다.
새로운 정치는 새 정치인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맞고, 민주당은 그 역사를 이쯤에서 마감하게 될 것 같다.